시인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 기쁨, 그 침묵의 공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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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정민의 열린 공간과 사유들▶ 브랜드 스페이스 탐구 [1] 토라야 아카사카점
시인의 미로 속에서
브랜드 스페이스 탐구 [3]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말하지 않는 순간 더 많은 말을 하는, 침묵의 공간
미로와 같은 시적 공간에서 헤매는 일
건축계의 시인이 만든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 브랜드 스페이스 탐구 [2] 스타벅스 로스터리
오래전 한 시인은 납작해지고 일렁이고 있던 얼굴을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난 반대로 내가 사는 공간이 그런 굴곡진 표면으로 들어가 납작해지고 일그러졌을 때만 되려 의미 있는 대상으로 여기곤 한다. 어딘가 다른 곳을 열망하고, 적절한 대상을 찾지 못하면서도 그 갈구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가능한 많은 부분을 덜어내고, 자연스러운 연결 대신 분절을 더 많이 만들고, 구조를 무너뜨리고 그대로 내버려 두지만, 그 파괴의 행위는 모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파괴의 충동은 포크너의 소설 <헛간, 불태우다>에서 그 아버지가 느끼는 그것과 같지만, 종이 한 장 위에서 모두 해갈되기에 평화롭게 끝난다.
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한다.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서 그곳에 사람들이 들어서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 안에서, 그 언어의 구석이 만들어낸 틈새 속에서 세계를 부정하고 무너뜨리고 나서 다시 스스로 꿈꾸고 상상하는 힘으로 하나하나 쌓아 올려 보라고 제안한다.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침묵의 공간
어떤 음악은 침묵하는 순간에 더 많은 것을 들려준다. 표면을 때리는 강렬한 타격음, 소리의 지형을 만들고 끊임없이 그 표면을 미끄러지며 마찰하던 소리들, 그 모든 격렬함이 멈추는 순간 진정한 음악이 시작된다. 상반되는 두 음악적 이미지의 병치 사이에서 공간이 생겨난다. 청자는 비로소 자신에게 밀려오던 힘의 작용에서 벗어나 그 역방향으로 자신의 의식을 밀어 넣는다. 창작가가 쏘아 올린 윤곽뿐이었던 이미지가 수용자의 머릿속에 내려앉아 색을 입는다.
시의 크기는 작다. 어떤 건 손바닥 하나로도 가릴 수 있다. 그 작음은 압축된 것이 아니다.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침묵이 발화보다 더 크다. 하지만 그 내밀함은 무한한 시적 공간을 창출한다. 프랑스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는 이런 시적 공간을 만들어지는 원리를 멀리 떨어진 두 이미지의 병치라고 말했다.
“이미지는 순전히 마음의 창조물입니다. 서로 멀어 보이는 리얼리티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병치함으로써 얻는 것입니다. 병치된 두 리얼리티의 관계가 멀고 진실해 보일수록 이미지는 그만큼 더 강력해집니다. 그리하여 정서적 힘과 시적 리얼리티가 더 커지게 됩니다.”
-폴 오스터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에서 발췌함
페소아의 책은 복잡한 미로다. 성급히 들어섰다가는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런데 온몸을 뒤흔들고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놀이기구처럼 즐거움도 준다. 양쪽으로 갈라진 그 틈에 머리를 처박고 그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빠져나와 머리를 뒤로 젖히면 몽상이 부풀어 오른다. 그러다 다시 그 책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 언뜻 그 모든 구조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도를 본 듯한 착각이 인다. 하지만 그건 순식간에 사라진다. 서브리미널 이미지처럼 딱 한 프레임만 끼워 넣어져 있다. 내 머리는 기계가 아니니 플레이백을 할 수도 없다.
견고함으로 완성되는 건축으로 시적 이미지를 창조한다는 건 어떠한 의미일까? 한국에서도 그가 설계한 공간을 만날 수 있다. 그중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전시 공간이지만 열린책들의 출판 브랜드인 미메시스의 이름이 붙은 브랜드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책은 직육면체다. 하지만 그걸 세우고 두꺼운 책장들을 한 손으로 훑으면 그 순간 거기에 곡면이 형성된다. 이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을 처음 보았을 때 외부의 곡면이 그 책장이 펼쳐지는 순간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을 설계한 알바루 시자는 그 모습을 고양이에서 영감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난 이 형태가 책의 모양새뿐 아니라 그것을 접하고 읽고 또 내 것으로 만드는, 어떤 정신적 과정을 형상화한 것 같다고 느꼈다. 직선에서 곡선으로 자연스러운 변신, 어떠한 대상을 강렬하게 갈구하는 순간, 펼쳐지는 평면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곡면. 외형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한번엔 눈으로 삼킬 수 있다. 짧은 시 한쪽처럼.
하지만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면, 특히 전시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외부의 단순성, 그 의식적 작음은 사라진다. 무언가를 감싸안듯 서서히 휘어지는 계단을 오르다 보면 기분도 가벼워진다.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이 보이는 원형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을 벽 하나가 가로지른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형태와 선들이 서로 만날 듯이 기어코 만나지 않는다. 모든 접점은 조금씩 떨어져 있다. 어딘가로 다다를 듯하지만, 결코 어디에도 다다르지 않는 길. 이것은 일종의 미로다. 가혹하지 않은 범위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미로. 그래서 밖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외부에서 보았던 그 형태의 어느 곳에 내가 있는지 단번에 알기 어렵다. 어느 벽을 보아도 그 벽이 끝나는 곳을 인지하기 쉽지 않기에 그 뒤에 계속해서 다른 공간이 존재할 것만 같다. 시인이 구축한 시적 공간이 내밀성으로 무한한 몽상을 펼쳐지는 공간을 제시하듯 이 공간도 외부에서 느껴졌던 단순성을 펼치고 나면 그 안에 영원히 무언가로 완결되지 않을 듯한 시적 공간에 대한 은유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