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사회주의 건설 현장 한가운데에서 근원적 사회주의를 상상한다는 것의 불온함

[arte] 서정의 머나먼 나라의 책 읽기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1928)
1920년대 러시아의 문학 지도를 잘 살펴보면 이후 소비에트 사회가 나아갈 바가 이미 가늠자로 펼쳐져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스탈린에 의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모든 예술 기조가 공식 통합되기 전 거의 마지막으로 작가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창작 활동을 펼쳤던 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시기 활동했던 작가군을 소위 잊힌 세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비록 집필이야 어떻게든 진행했다 하더라도 검열 문제로 매번 출판 불가 판정을 받다가 1980년대에 와서야 페레스트로이카 물결을 타고 봇물 터지듯 세상에 (그것도 해외에서 먼저) 얼굴을 드러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또한 혁명을 온몸으로 산 그 세대 작가다. 1928년에 완성된 그의 작품 『체벤구르』는 서구에서 열광하듯 소련이라는 체제 비판에 관심을 두기보다, 실은 혁명 세계의 근원 탐구에 열정을 쏟는다. 플라토노프 생전에 소련 저널에는 이 소설을 구성하는 일부분만이 발췌되어 단편 형식으로 실렸고(1929), 전문은 수십 년간 출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정식 출판은 1972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먼저 이루어졌고 소련에서는 1988년에야 가능했다.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초의 파편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특이한 구문 구성, 부서진 언어를 모순된 조어법으로 자주 사용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지닌다.
[좌] 아즈부카에서 펴낸 러시아판 『체벤구르』 표지 [우] 펭귄에서 펴낸 영국판 『체벤구르』 표지 / 필자 제공
진정한 혁명의 지지자

1899년 러시아 남부 보로네시 근교의 작은 마을 얌스카야 슬로보다에서 출생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일용직 노동자, 파이프 공장 주물공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성장했다. 혁명 덕분에 철도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고 그도 분명히 밝히고 있)고 종군 기자이자 철도 기관사 보조로 내전에 참여했다. 단편과 시, 사설 등을 발표하며 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 창립 회의에 참여하는 등 작가로 의욕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1921년 러시아 남부에 끔찍한 기근이 들자 문학과 같은 관조적인 일에만 매달릴 수 없다며 토지개량 기사로서 지역에 근무하였고, 그럼에도 농촌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는 공문을 모스크바로 꾸준히 발송하는 등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다.

혁명과 관련한 개별 사건들에 직접 참여한 자로서 플라토노프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진심으로 믿었지만, 그토록 혁명을 사랑한 만큼 1920년대 초 이미 소비에트 정부를 빠르게 잠식하기 시작한 관료주의를 우려했다. 엔지니어이자 저널리스트로 일하면서 그는 기근, 집단화 등으로 인한 지역 사회의 황폐화와 농촌 사람들의 절망을 목격했고 또, 기록했다. 그 기록이 유토피아에 대한 고뇌와 사회주의 실험에 대한 우려를 전하는 『체벤구르』의 어둡고 초현실적인 묘사를 뒷받침했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1940년대) / 출처. Wikimedia Commons
『체벤구르』는 알렉산드르(사샤) 드바노프가 공산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믿어지는 ‘체벤구르’라는 마을을 찾아가게 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소설이다. 내러티브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견해를 대표하는 상반된 캐릭터들과의 일련의 만남을 통해 전개된다. 이는 혁명에 대한 희망과 절망을 반영하는 목소리의 다성악을 만들어낸다. 텍스트는 원형 구조의 원리로 구성되어서 마지막에 이르면 주인공의 어린 시절 장면을 반복하여 처음으로 돌아간다. 즉, 소설의 시작에서는 어부였던 사샤의 아버지가 무테보 호수에서 자살하고(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호수 밑바닥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표현되고 있다), 소설의 끝에서는 혁명의 비애를 맛본 사샤가 다시 물에 잠기며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무테보 호수는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신화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장인(匠人)의 세계이해

제1부 「장인의 기원」에서는 주인공 사샤 드바노프의 어린 시절이 펼쳐진다. 철저한 고아 감각이 사샤를 감싼다. 친부의 자살과 프로호르 드바노프의 양자로 살아가는 어린 시절이 그려지고 기계에 미친, 기계를 통한 세계의 구원을 믿는, “인간의 바로 그 불타는 흥분된 힘, 노동하는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출구도 찾지 못한 채 침묵하고 있는 힘을 기관차에서 찾아”낸 자하르 파블로비치와 만난 사샤가 연민과 사랑의 실천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확립하고 혁명기 공산당에 입당하며 내전에 참전하는 과정을 그린다. 드바노프가에서 보낸 시절에서는 훗날 체벤구르에서 재회하게 되는 형제이자 동갑내기 친구 프로샤와 여러모로 대비된다. 사샤가 본질을 고민하며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살아가는 캐릭터라면, 프로샤는 만사를 철저히 계산하며 기회주의적으로 현실을 돌파해 나가는 인물로 묘사된다.
『체벤구르』 일러스트 (스베틀라나 필리포바) / 출처. vitanova.ru
기계를 통한 인간 능력의 증폭에 환호하며 그 힘의 정직한 발로를 사랑하는 장인은 이로써 물질을 느끼고 그것과 존재론적으로 연결된다. 떠나는 사샤에게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고아인 그에게 삶이 거저 주어졌으니 아끼지 말고 가장 주된 삶을 살라고, 볼셰비키는 그 안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도록 “텅 빈 심장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자하르 파블로비치의 그늘에서 뼈와 살이 형성된 사샤 드바노프는 보호자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간다.

사회주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제2부 「열린 심장으로 떠나는 여행」은 주인공 사샤가 공산주의를 찾아다니는 여정을 그린다. 먼저 그는 “불평도 하지 않고 혁명의 고통을 겪어 내는, 참을성 있게 방과 구원을 찾아서 스텝 지대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많은 사람을 목격한다. 내전 중 열차 사고를 겪고 집으로 돌아온 사샤는 열병을 앓고 죽다가 살아나고 이웃집 소녀 소냐를 통해 남녀의 사랑을 알아가려는 순간 당의 명령으로 민간에 싹튼 공산주의를 찾아 길을 떠난다. 사샤를 지도원으로 지방에 파견하는 현청위원회 위원 슈밀린의 말에는 혁명의 당위성과 시급성이 절절히 묻어난다(그의 아내는 티푸스로 죽어간다). “빨리 사회주의를 시작해야만 해. 안 그러면 아내는 죽고 말 거야.”

스텝에서 갱단으로 묘사된 므라친스키의 아나키스트 부대를 만나 위험에 처한 사샤를 구한 것은 방황하는 혁명의 기사이자 일종의 돈키호테인 스테판 코푠킨이다. 그가 타고 다니는 말의 이름은 ‘프롤레타리아의 힘’이며 그의 ‘둘시네아’는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그의 “마음의 여인”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적에게 살해당해 독일에 묻혔다. 코푠킨은 로자를 자신의 신부로 여기고 그녀를 위해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복수하는 꿈을 꾼다. 코푠킨은 “혁명으로 인해 개성이 지니는 특성들이 마모된” 평범한 “국제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외투를 입고 가슴에 방패를 대고 잠을 잔다. 사샤에 대한 코푠킨의 신뢰와 애정은 무한하다. 사샤가 작가 플라토노프의 반영인 만큼 진정한 노동자 출신 인텔리겐치아로 그려지는 사샤에 공산주의 기사가 보내는 존경인 셈이다.

이 둘은 러시아의 시골 마을 곳곳을 떠돌며 공산주의의 실제를 마주한다. 사람들이 따스한 집안에서 실컷 먹고 나서 금방 잠이 드는 좋은 곳을 바란다는 것이다. 사샤 드바노프와 코푠킨은 공산주의를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발견되는 것으로서의 ‘물질’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다가 체벤구르의 혁명위원장인 체푸르니를 만나 낯선 나라의 매혹적인 윙윙거리는 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체벤구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된다. 체푸르니는 체벤구르가 “삶의 행복과 진리의 정확함, 그리고 존재의 슬픔이 필요 정도에 따라 저절로 발생”하는 장소라고 말하며, 아내는 없고 “여성 동지들”만이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한 등장인물은 “빈곤과 서로의 정신적 무자비함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협동조합을 찾기 위해 체벤구르로 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집단농장에 찬성표 던지는 농촌 주민(1928) / 출처. pikabu.ru
조직된 새 세상에서

제3부 「체벤구르」에서는 사샤와 코푠킨이 공산주의가 도래했다는 체벤구르에 도착한다. 볼셰비키에 의해 부르주아들은 이미 총살당했다. 공산주의의 도래로 전 세계 모든 역사는 끝이 났고 인간은 노동하지 않으며 모든 세금과 부역은 태양이 부담한다. 이곳에서 노동은 “탐욕의 유물이며, 착취적이고 동물적인 색욕”이라 선언되는데, 이는 “노동이 바로 사유 재산의 근원이 되며, 재산은 억압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고, “태양은 사람들에게 생활에 충분할 정도의 배급량을 부여하는데, 만약 사람들이 노동을 통해 일부러 그 배급량을 증가시킨다면, 이것이 다시 계급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모닥불이 될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인 것이 된다.

이 ‘조직된’ 새 세상에서 순진무구한 아이가 병과 가난으로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이를 위한 모든 조건이 쟁취된 곳”인 체벤구르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지도자 체푸르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아이가 죽은 후 체벤구르를 떠나며 아이의 엄마인 거지 여자가 남긴 “당신에겐 내 아이가 소중한 게 아니라, 당신의 상상만이 필요한 거예요!”라는 말은 그 세계의 조직자들이 방기한 생의 더 깊은 차원들을 암시하며, 그 기획의 한계는 “공산주의가 이미 공식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사람들은 무엇에 의해서 비공식적으로 살고 있는가”하는 체푸르니의 한탄으로 다시 증명되기도 한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lt;추수&gt;(1928-29) / 출처. Wikimedia Commons
플라토노프는 진정 혁명을 믿었고 사회와 인간 모두의 큰 변화를 기다렸다. 그가 19세기 러시아 사상가 니콜라이 표도로프가 설파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단결할 수 있을 때 우주 전체가 분자 수준에서 변할 것이며, 그때 사람들은 자연을 통제할 수도 있게 되고 기술적으로 식량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산주의, “육체에서만 <...> 물질적인 감각으로 살아가는” 공산주의의 그 강건한 육체를 위해 플라토노프는 드바노프로 하여금 “야채와 곡식이 더 잘 자라도록 시냇물에 관개용 제방을 만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깊은 차원의 유토피아

‘정화’된 체벤구르에 남은 주민은 11명의 공산주의자와 1명의 여성인 클라브듀샤다. 새로운 복음을 전하는 역사 이후의 ‘열두 사도’인 셈인데 이들은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 받아들인 프롤레타리아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무노동과 무감각의 현장을 목격하는 코푠킨의 영혼에 우울이 자란다. 체푸르니는 고독 속에서 “새로운 삶을 기대하고 자연의 반혁명적 선함을 묵상”하기 위해 들판을 방황한다. 흥미로운 캐릭터는 관료이자 도둑인 프로코피인데,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혁명을 공식화”하면서도 자신이 읽지도 않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물러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와 그의 애인 클라브듀샤는 부르주아지가 남긴 물건을 빼돌려 판다. 체벤구르는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어디선가 나타난 코사크 군대의 공격을 받아 코뮌의 수비군 거의 모두가 죽는다. 살아남은 드바노프는 아버지가 익사한 호수로 가서 물에 들어가 아버지와 재회한다. 프로코피만이 살아남아 도시의 폐허를 바라보며 눈물 흘린다.
알렉산드르 라바스 &lt;실험실&gt;(1928) / 출처. museum.ru
최근 수십 년 동안 러시아 학자들은 <체벤구르>를 초기 소련 역사의 사회적 모순을 반영하는 걸작으로 점점 더 인식하고 있다. 플라토노프는 사회적 격변의 상황에서 인간의 조건을 깊이 탐구하되, 그가 제시하는 세계에서는 좋은 꿈과 악몽, 진보와 황폐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러면서도 보편적인 형제애가 공산주의의 핵심임을 절절히 전하는데 그것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마는 현실마저도 담담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사회주의는 우선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자라야 함을 역설한다. 한편, 플라토노프는 “혁명은 바보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다”에서부터 “혁명 이 전의 공포에 의한 혁명 이후의 공포의 정당화”라는 명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못해 정반대 지점에 있다고 볼 수도 있는 해석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는 호수 바닥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샤의 마지막 모습처럼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그리하여 혁명이 지닌 그 불가능과 비현실의 모습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장치다. 혁명의 목적은 사랑의 실천이 가능한 시공간을 창조하는 것이고,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려는 이러한 시도야말로 비현실적인 ‘체벤구르’를 더 이상 현실적일 수 없는 역사 속 혁명에 맞닿게 한다.

소설의 열린 결말은 진실한 공산주의자였던 플라토노프의 한층 강력해진 꿈이었다. 이는 유토피아를 어떻게 꿈꿀 것인가에 대한 논의의 시작점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다 놓는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