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새로운 보물창고, V&A의 '몰입형 수장고'를 소개합니다

[arte] 박소연의 영국 소장품 아카이브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의 개방형 수장고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 내부 모습 / 사진. © 박소연
지난 5월 31일,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V&A)이 런던 동부에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 (V&A East Storehouse, 이하 스토어하우스)’를 대중에게 개방했다. 스토어하우스는 통상 비공개인 박물관 수장고들과 달리, 소장품의 보존 상태와 아카이브를 대중이 직접 볼 수 있는 개방형 수장고다.

2018년부터 진행된 블라이스 하우스(Blythe House) 대규모 수장고 이전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데이비드 보위 컬렉션을 비롯한 수많은 소장품들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개방형 수장고로 박물관의 문턱을 낮추고, 그동안 소유만 해오던 소장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관람객과 깊이 있는 소통을 하려는 V&A의 새로운 시도다.

스토어하우스는 런던 동부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내에 자리하고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미디어 방송 센터로 사용된 건물이 대규모 수장고로 탈바꿈하면서, 문화의 심장부로 변모했다. 스포츠 시설과 다양한 신생 기업들이 입주했고, 런던 패션 대학이 이곳으로 이전했다. 새들러스 웰스(Sadler’s Wells) 극장 설립 등과 함께 이 지역은 젊고 활기 넘치는 문화 지구로 거듭나고 있다. V&A는 ‘V&A 이스트 (V&A East)’ 개관도 준비하고 있어 런던 동부 문화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 내부 모습 / 사진. © 박소연
스토어하우스에 들어서는 순간, 방문객들은 특별한 경험을 한다. 1층 휴게 공간에는 작은 책장형 벽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를 하나씩 당겨보면 액자에 보관된 섬세한 텍스타일 소장품을 만날 수 있다. 본관 내부로 들어서면 높은 층고와 메쉬 소재의 내부 구조물이 한눈에 들어와 거대한 수장고의 규모를 실감나게 한다. 이곳에는 25만 점의 소장품과 30만 권의 아카이브 자료가 소장되어 있으며, 관람객은 이 방대한 컬렉션이 어떻게 수집되고 보존되는지 스스로 관찰하면서 박물관의 숨겨진 노력을 살펴볼 수 있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1층 휴게 공간에 위치한 텍스타일 소장품 / 사진. © Kemka Ajoku
스토어하우스의 학예팀은 6개월마다 100여 점의 소장품 일부를 주기적으로 교체한다. 큐레이터들이 직접 선정한 소장품들은 ‘컬렉팅 이야기 (Collecting Stories)’, ‘디자인 소스북 (Sourcebook for Design)’, ‘일하는 미술관 (The Working Museum)’의 세 가지 주제로 나뉘어 전시된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각 소장품에 담긴 이야기를 보다 더 의미 있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 '일하는 미술관' 카테고리 중 ‘예방보존(Preventive Conservation)’에 관한 설명. 박물관에서 소장품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충 방지 트랩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 사진. © 박소연
스토어하우스에서는 장신구, 의복, 가구, 도자기 등 V&A를 대표하는 소장품 외에도 특별한 이야기를 품은 대형 소장품도 만나볼 수 있다. 스페인의 토리호스 (Torrijos) 궁전 천장, 1930년대 코프만 (Kaufmann) 사무실, 17세기 무굴제국 아그라 요새의 기둥 (Agra Colonnade), 현대 부엌의 원조인 20세기 프랑크푸르트 부엌 (Frankfurt Kitchen)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철거된 아파트 단지 로빈후드 가든즈 (Robin Hood Gardens)의 외벽이다.
수장고 중심부 외에도 별도로 마련된 대형 작업 관람실에서 대형 소장품을 만날 수 있다. 위 소장품은 피카소가 디자인 작업에 참여한 발레 뤼스 발레단(Ballets Russes)의 ‘르 트레인 블루(Le Train Bleu)' 공연의 무대 배경이다. / 사진. © David Parry/PA Media Assignments
1972년에 완공된 로빈후드 가든즈는 브루탈리즘과 사회 주택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나 2008년 철거 계획이 발표되었다. 자하 하디드, 리차드 로저스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7년 완전히 철거되었다. V&A는 이 건물 3개 층의 외벽과 그 안의 두 가구 주택을 보존하기로 결정했고, 설치 미술가 서도호 작가에게 커미션 작업을 의뢰했다.
V&A가 소장한 로빈후드 가든즈 외벽 / 사진. © David Parry/PA Media Assignments
서도호 작가는 거주민들과 소통하며 건물의 외관과 내부를 파노라마 타임랩스 및 3D 스캐닝 기술로 기록했다. 그는 50년도 채 되지 않아 사라진 건물의 물리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곳에 깃든 삶과 기억이라는 무형의 가치에도 주목했다. 스토어하우스에 전시된 로빈후드 가든즈 외벽 뒤로 그의 프로젝트 영상이 상영되고 있고 이를 통해 관람객이 건물의 실제 일부와 함께 몰입하며 건축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 외부 모습 / 사진. © Hufton+Crow
V&A의 스토어하우스 개관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단순히 ‘보이는 수장고’가 아닌 관객들과 소통하며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몰입형 수장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13일에 오픈한 스토어하우스 내 데이비드 보위 센터 또한 오픈 전부터 예약 티켓이 모두 매진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앞으로 V&A가 소장품을 통해 대중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나아가 런던 동부의 문화 지형에 어떤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지 기대가 된다.

런던=박소연 테이트 미술관 수장고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