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의 디자이너가 애플 워치 속 그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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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신지혜의 영화와 영감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Her)>는 근미래적 설정에 감정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속 근미래는 상당히 근접한 미래로 느껴지는데 이미 우리의 현실은 AI와 꽤 많은 작업을 함께하고 있는 데다 단절과 연대에 대한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그녀'의 AI 인터페이스를 만든 디자이너
영화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처녀 자살 소동' 등
영화 미술 작업에도 참여
애플, 나이키 등 상업 디자인에도 재능
그의 작업에서 따스함을 찾을 수 있는 이유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한다는 태도
<그녀>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이지만 정작 그의 마음은 공허하고 쓸쓸하다. 아내와 별거 중이고 타인과의 교류도 별로 없이 늘 비슷한 일을 해내며 매일 매일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삶은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의 내면,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편지를 써주곤 하지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준 적도 없이 홀로 살아가는 삶은 점차 외로움과 공허로 들어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큰 결심을 한다. 혼자인 삶에 타자를 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 타자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웃어주고 동의해주고 공감해주는 AI이다.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대중들에게서 큰 공감을 얻었고 근미래의 인간관계와 공감,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재미있게도 그녀, 사만다의 목소리역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은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음에도 이 작품으로 아메리칸 코미디 어워드 영화 부문 코미디 여우조연상 등의 후보에 올랐고 로마국제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과 새턴상 최우수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그녀>에서 중요한 인물은 물론 테오로드이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바로 사만다이다. 영화 속에서 목소리만 들리고 분명히 인간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지만 테오도르 뿐만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관객 모두는 사만다에게 마음을 향하고 있다. ‘사만다’는 존재하는 ‘인물’인 것일까, 아주 거칠게 말해 단지 ‘기계’일 뿐일까.
영화 속에서 그런 ‘사만다’가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혹시 기억하시는지. 사만다의 인터페이스는 바로 이것이다.
참신하고 세련된 느낌의 디자인으로 가득한 세상이고 아무리 멋진 디자인이라 해도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이 누구인지 크게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나처럼 디자인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제프 맥페트리지의 이름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는 다방면으로 자신의 취향과 재능을 녹여내며 신선한 감동을 주며 우리의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이니 말이다.
영화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는 디자이너 제프 캑페트리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나 디자인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일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에게 그의 이름은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서너가지만 나열해도 아~ 하는 탄성을 자아낼 것이다.
일단 영화부터 시작하자면 <그녀>, <존 말코비치 되기>, <처녀 자살 소동>, <괴물들이 사는 나라> 등이 있다. <그녀>는 앞서 설명했듯이 (테오도르에게는 ‘사만다’였던) 인공지능 운영체계의 디자인이 기억에 남는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스파이크 존즈의 장편 데뷔작인데 배우 존 말코비치의 뇌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한 남자의 이야기로 타인의 의식과 감각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게 된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초현실주의 판타지라고 해야 할까. 오래전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그 유니크한 감성은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데뷔작 <처녀 자살 소동> 또한 만만치 않은 디자인들로 채워져 있다. 아름답고 몽환적이지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오브제들이 극의 분위기에 일조하는데 이런 분위기를 함께 지어낸 디자이너가 바로 제프 맥페트리지인 것이다.
상업 디자인 분야에서의 성과를 이야기한다면 조금 더 친숙한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애플, 나이키, 에르메스, 반스, 파타코니아, 오레오, 펩시 등 대중적인 브랜드에서 그의 디자인은 빛을 발한다. 간결하면서도 고루하지 않고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그의 디자인은 단숨에 눈과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타고난 재능이 대단하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의 어머니는 인터뷰에서 아들이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 그다지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그저 그 또래 소년들의 그림이었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가 지금의 그에게 도달하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일찌감치 깨닫고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일찌감치 알아챘으며 그 향방을 따라 꾸준하고도 성실하게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이면에는 디자이너로서의 타고난 민감함과 섬세함이 있었겠지만 그의 노력은 그 재능을 한층 더 끌어올렸음이 분명하다.
영화를 연출한 댄 코버트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이자 아버지, 마라톤 선수이기도 한 그의 쿨하고 차분하고 긍정적이며 가족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뭔가 꾸며낸 것일 거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고통받는 예술가’에 대한 고정관념, 술과 분노에 찌든 남성 예술가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촬영을 하면서 저는 제프 맥페트리지의 예술 뿐 아니라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감독이 말한 것처럼 제프 맥페트리지는 성실하고 근면하며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있고 그런 삶에 대한 태도가 그의 디자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간결하고 따스하며 견고하고 포용력있는 느낌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독은 근본적인 질문을 얻었고 그 질문을 관객들에게 한다. ‘무엇이 한 사람의 인생을 정의하는가? 우리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결정하는가’*
이 영화가 당신의 마음에 가닿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의 재능과 업적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제프 맥페트리지의 삶에 대한 태도 때문일 것이다.
제프 맥페트리지를 접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오른 것은 단순히 그들이 러너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세계에서 큰 족적을 남겼고 자신의 일을 지속하고 있으며 성실하고 흐트러짐 없는 삶을 견지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그 일환으로 체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 연결된 것 같다. 한 번뿐인 삶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면 그렇게 단단하고 견고한 성실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이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으므로 정리된 것을 흐트러뜨리거나 정돈된 것을 헤집어 놓기는 쉽다. 지속적인 안정성을 유지하고 질서정연한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은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 것이다.
영화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는 그가 디자인에 입문하면서 지금까지의 활동을 보여준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자녀가 십대에 접어든 지금의 시간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다뤄내면서도 장황하지 않게 요점을 찍어 준다.
결국 그가 자신의 디자인을 통해 드러내고 보여주고 공유한 것은 성실하고 균형 잡힌 삶과 그러한 삶에 대한 태도인 것이다. 그런 태도는 그의 일상뿐 아니라 매일 작업하는 드로잉의 선과 색을 칠하는 붓의 속도와 꼼꼼함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디자인이 참신하고 신선하며 아름다운 이유를 드디어 찾아내었다.
신지혜 칼럼니스트•작가
*: 영화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 보도자료 (영화사 진진)
[참고 영화]
<그녀 Her>. 스파이크 존즈 감독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 Geoff McFetridge : Drawing a Life>. 댄 코버트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