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의 부모님은 여인숙과 양조장, 술집을 운영했다. 손님들이 부르는 민요와 인근 병영에서 들려온 군가는 어린 말러의 음악적 재능을 일깨웠다. 삶의 구체적 순간에서 시작해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며 만든 그의 웅장한 사운드는 생전에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때로는 연주가 100분을 넘어가며, 편성도 거대하고 합창까지 쏟아지는 그의 작품은 난해할 뿐 아니라 연주와 녹음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의 공연 <슈트라우스와 말러의 독일 낭만 음악>. 최혁 기자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뮌헨 궁정악단의 수석 호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슈트라우스는 작곡가와 지휘자로 모두 명성을 떨치며 80년 넘게 살았다. 하지만 12음기법 등 반음계적 표현주의를 주도한 제2빈악파가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면서, 조성 음악을 떠나지 않은 그의 작품들은 한동안 유행이 지난 낡은 음악으로 평가받았다.
녹음 기술의 발달, 작곡과 연주 스펙트럼의 확장, 스타 지휘자들의 등장으로 고전음악의 세계가 한계를 무너뜨리자, 말러의 호수와 슈트라우스의 산을 둘러싼 안개가 걷혔다. 사람들은 인생의 고뇌를 담아낸 웅장하고 거대한 말러의 호수, 시대의 예술과 철학, 문학을 발판 삼아 정교하게 쌓아온 슈트라우스의 봉우리의 마주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은 지난해부터 리스트의 교향시와 번스타인의 작품, 말러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긴 교향곡을 잇달아 선보였다. 특히 올해부터는 웨버의 유령과 홀스트의 행성, 아당의 지젤 등을 연주하며 고전음악이 가진 한도 없는 매력을 대중에게 선보여왔다. 말러의 초기 교향곡의 기반이 된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와 슈트라우스 대표적인 교향시 ‘돈 후안’, ‘장미의 기사 모음곡’ 등을 선곡한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에선 여자경이 지휘봉을 잡았다. 여자경은 사전 인터뷰에서 “관객 반응이 보장되는 선곡이 아닌 새로운 감상을 나눌 수 있는 작품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국내외 유수의 무대에서 맑고 깨끗한, 폭넓은 음역의 목소리로 가곡의 아름다움을 선보인 황수미도 새로운 감상을 끌어내는 무대에 힘을 보탰다.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의 공연 <슈트라우스와 말러의 독일 낭만 음악>. 최혁 기자스크린을 통한 작품 해설로 연주의 시작을 알리자, 관객들은 극장에 온 듯 숨을 죽이고 돈 후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휘몰아치는 현악과 강렬한 타격감의 타악기 소리가 주제 연주를 맹렬하게 시작했다. ‘돈 후안’은 짧은 곡이지만 인물들의 다양한 행위와 감정이 풍부하게 묘사돼 있다. 지휘자에 따라 이 드라마의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지가 전체적인 연주의 향방을 결정하는데, 여자경은 섬세한 표현으로 로맨스를 그리기보다 강렬한 볼륨 조절로 돈 후안의 영웅적 서사를 부각시키는 데 집중했다. 밀도 있게 중반부까지 연주를 끌어온 여자경은 돈 후안이 두 번째로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 이르러 전반부에 부족했던 감정 표현을 보완하는 듯했다. 목관의 서정적인 음색으로 로맨스를 그려낸 오케스트라는 영웅의 주제와 무도회 장면에 이르러 볼륨을 한껏 높였다. 호른을 비롯한 금관악기들이 목청을 올리며 극적인 대비를 만들자 웅장한 서사가 대단원에 도달했다. 이후 잠시 지휘봉을 높게 든 지휘자의 손짓을 따라 오케스트라는 숨을 죽였고, 돈 후안의 최후를 그린 마지막 장면에 비장함을 더했다.
이어서 분홍 장밋빛 드레스를 입은 소프라노 황수미가 등장하자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반주가 시작됐다. 앞선 연주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던 오케스트라가 볼륨을 높이자, 황수미는 능숙하게 톤을 조정하며 ‘누가 이 노래를 지었을까?’를 노래했다. 특유의 맑고 청명한 목소리가 연주장을 고루 울리자 오케스트라도 곧 목소리에 어울리는 음색으로 반주를 이어갔다. ‘여름의 임무 교대’에서는 목관악기의 청아한 소리에 견줄만한 빛나는 목소리와 표정 연기가, ‘라인강의 전설’에서는 노래 속 풍경을 그리는 듯한 묘사가 관객의 몰입을 이끌었다. ‘헛수고’를 부를 때 황수미는 두 명 배우가 되어 짧은 단막극을 보는듯한 재치 있는 장면을 만들기도 했다. ‘지상에서의 삶'에선 완급조절로 이야기의 비극미를 강조했다면, ‘천상에서의 삶’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음색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연주 내내 연극무대의 오퍼레이터처럼 섬세하게 서사에 필요한 요소를 부각하는 여자경의 지휘도 인상 깊었다.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의 공연 <슈트라우스와 말러의 독일 낭만 음악>. 최혁 기자인터미션 후 이어진 ‘장미의 기사’ 연주에서 오케스트라는 차분하지만 웅장하고 우아한 음색으로 단숨에 새로운 극의 막을 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음악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고 할 만큼 작품에 세밀한 표현을 담아두었는데, 오케스트라는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낭만적이고 입체적으로 표현해냈다. 옥스의 왈츠 주제에서 여자경은 온몸으로 오케스트라의 세밀한 소리를 이끌어냈는데, 절묘한 리듬 표현으로 아름다움 속에 담긴 냉소와 풍자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원수부인과 옥타비안, 조피의 복잡한 심경을 그려내는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현악기와 목관, 금관악기는 각 등장인물의 미묘한 감정을 마치 가사가 있는 노래처럼 표현해냈다. 마지막 왈츠는 처음과 같이 웅장함을 강조했지만, 타악 파트의 완급 조절로 세밀한 묘사를 더해 관객의 집중력을 높였다. 극적인 표현을 강조한 이날의 ‘장미의 기사’는 절절한 로맨스라기보다 다이나믹하고 유머러스한 인간사를 그린 한 편의 영화와 같았다.
앙코르에선 앞선 모든 드라마를 아우는 듯한 결말 같은 가곡 ‘내일'이 연주됐다. 1부가 끝나고 앙코르 없이 퇴장했던 황수미가 다시 등장하자 객석은 얕은 환호로 반색했다. 꿈결 같은 음색으로 시작된 황수미의 노래에 오케스트라가 농밀한 반주를 더했고, 음표들은 장마로 무거워진 공기를 밀어내며 객석 곳곳에 아름다움을 전했다.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의 공연 <슈트라우스와 말러의 독일 낭만 음악>. 최혁 기자음악의 숭고함은 눈앞에서 재현될 때 더욱 깊은 공감을 만들어낸다.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전통적인 형식을 확장하고 한계까지 밀어붙여 음악의 아우라를 확장했다. 그 아우라를 직접 목격할 수 있도록 한경아르떼 필하모닉과 지휘자 여자경, 소프라노 황수미는 한 편의 연극 같은 무대를 선보였다. 그 속에서 관객들은 시대와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의 기쁨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