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 혐오 대신 우연과 불협화음 소환한 백남준과 쇤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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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수미의 최애의 최애우리는 ‘간편한 차단’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SNS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게시물을 보게 되면 작성자를 긴 고민 없이 끊어낼 수 있다. 하지만 비상계엄 사태와 이어진 대선 레이스를 거치며 생각이 많아졌다. 오래된 지인 중에서도 나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들을 확인하게 되니, '차단'과 '삭제'로 향하던 손가락이 멈칫하게 됐다. 우리가 왜, 언제, 어디서부터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건지 묻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다 문득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에서 전원일치 결정을 이끌어내기까지 4개월의 시간을 들였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설득은 정말 가능할까? 그것이 차단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불협의 시대,
차단 대신 소통을 선택한다는 것
미디어의 소통 확장성 발견한 백남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대한 백남준식의 유머러스한 반론이다. 오웰은 소설에서 TV와 매스미디어가 인간을 통제하는 암울한 미래를 전망했지만, 백남준은 실제 도래한 1984년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역설하고자 했다. 그 역시 미디어를 무조건 낙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있는 소통의 잠재력을 믿었다. 만나지 못했던 것들이 조우하고 뒤섞일 때, 얼마나 창조적인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라이브로 펼쳐 보였다.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앨런 긴즈버그, 샬롯 무어만 등 당대의 전위 예술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함께했다. 방송은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실수인지 연출인지 아리송한 덜컥거림도 종종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그 모든 우연과 예측 불가능성 또한 소통의 일부로 여겼다. 미디어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고자 할 때만 얻을 수 있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공위성은 우연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기치 못한 만남을 유도할 것이며, 인류 뇌세포의 연결고리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 백남준,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재)경기문화재단 백남준아트센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당시 KBS를 통해 한국에도 생중계됐다. 정부가 해외여행을 규제하던 시절, 새벽 시간대에 송출됐음에도 당시 한국에서 약 680만 명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진다.]
불협화음과 혁명, 쇤베르크에 빠진 소년 백남준
쇤베르크는 으뜸음이 모든 화음과 화성을 결정하는 조성 체계와 협화음 중심으로 작곡해야 하는 음악적 질서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불협화음을 협화음의 적이 아닌 확장으로(피터 게이, 『모더니즘』)” 여기며 ‘불협화음의 해방’을 이끌었다. 장조도 단조도 아닌 무조음악에서 나아가 한 옥타브에 속한 12개의 반음을 한 번씩만 사용하는 음렬을 설정하고, 이를 조합해 곡 전체를 구성하는 12음 기법을 고안했다. 그 결과물을 귀로 들으면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 긴장감이 계속되지만, 예술이 사회에 담긴 고통을 담아내고 진리를 암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아도르노 같은 철학자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다. 쇤베르크는 1차 세계대전의 충격에 이어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나치의 부상이 요동치던 시대를 살았다. 조성 해체와 12음의 평등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음악적 대응으로 여겨진다.
해방 이후, 가난에 대한 해방 욕구와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마르크스주의로 수렴되는 분위기 속에서 중학생 백남준 또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한국 전쟁을 겪으며 이념에는 곧 회의를 느꼈지만 “쇤베르크 발견은 마르크스로부터(임산, 『청년, 백남준: 초기 예술의 융합 미학』)” 나왔다. 기존 질서에 저항하고 경계에 서서 세계를 확장하는 쇤베르크의 아방가르드 정신은 백남준이 타국에서 민족·이데올로기·국가에 대해 불분명한 정체성으로 분투하는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내면을 지탱해 주었다. 식민지의 언어 속에 억눌리고,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폭력을 목격한 소년 백남준은 쇤베르크의 불협이야말로 현실을 투영하는 정직한 울림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봤는지도 모른다.
분열의 시대를 건너는 법
오늘날 미디어는 알고리즘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장착한 채, 세상을 서로 고립된 완벽한 섬으로 나누는 데 점점 더 능숙해지고 있다. “예술가라면 미래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백남준은 이미 오래전에 이 같은 세태에 필요한 해법을 예술로 제시했다. 그는 냉전의 산물이던 인공위성을, 세계 질서 통제의 도구가 아니라 연결과 소통의 매개로 전복시켰다. 그리고 그가 말한 “미래 사회의 강력한 무기(남정호, 『백남준』)”인 소통은 매끄러운 합의가 아니라, 충돌과 엇갈림, 허점과 우연이 공존하는 것이었다.
서로가 결코 설득하거나 설득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으로 감행하는 차단은 결국 알고리즘이 설계한 분열된 미래에 순응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 세계는 불협화음 없이 안온해 보일지언정 속으로는 서늘한 혐오와 낙인을 품고 있다. 반면, 불편한 소리에 자신을 열어두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가치 있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참여하겠다는 소통에의 의지이자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으리라는 희망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쇤베르크의 음악도 이전과 조금은 다르게 들린다. 내가 발 디딘 세계에서 우연과 예측 불가능성 가득한 ‘이상한 연결’은 어떤 모습일까, 자주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아놀드 쇤베르크, <피아노 소품> Op.33a I.Mässig]
김수미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