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출신 지휘자 이반 피셔 / 사진출처.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홈페이지 제공.
헝가리 출신 지휘자 이반 피셔 / 사진출처.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홈페이지 제공.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오는 5~7일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열리는 말러 교향곡 5번 공연을 앞두고 지휘자를 전격 교체했다. 헝가리 출신 거장 이반 피셔와 콘트라베이스의 무대 배치를 놓고 합의하지 못하면서다.

베를린필은 지난달 29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피셔와의 상호 합의에 따라 이번 공연의 지휘자를 교체한다"고 밝혔다. 말러 교향곡 5번의 연주자 배치에 합의하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악단은 "양측은 이번 결과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서로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설명했다.

지휘봉은 콜롬비아 출신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가 넘겨받았다. 하이든의 협주교향곡과 말러 교향곡 5번으로 구성된 프로그램과 공연 일정은 그대로 유지된다.

쟁점은 콘트라베이스를 목관악기 뒤쪽, 무대 중앙에 배치하는 문제였다. 피셔는 지난달 31일 공개된 독일 음악 전문 매체 VAN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배치가 목관 연주자들의 화성 이해를 돕고 리듬과 합주를 개선한다"고 설명했다.
오스트리아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열린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무대 뒤편에 콘트라베이스가 일렬로 배치돼 있다. /  사진 출처. 빈 필하모닉 홈페이지 제공
오스트리아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열린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무대 뒤편에 콘트라베이스가 일렬로 배치돼 있다. / 사진 출처. 빈 필하모닉 홈페이지 제공
중앙에서 들려오는 저음을 바탕으로 연주자들이 화음 안에서 자신이 맡은 음의 역할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는 일반적으로 현악기군의 첼로 파트 뒤쪽에 주로 배치된다.

피셔의 제안은 저음의 중심을 무대 가운데로 옮겨 합주의 토대를 바꾸려는 구상이었다.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5번은 호른 6대와 트럼펫 4대, 트폼본 3대와 튜바를 비롯해 목관,타악,하프와 현악기가 총동원되는 대편성 관현악곡이다. 여러 악기군의 소리를 정교하게 맞춰야 하는 만큼 무대 배치는 음량의 균형과 연주자 간 호흡에 영향을 미친다.

지휘자 홍석원 서울대 음대 교수는 이러한 배치에 대해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이 무대 전체를 감싸 단단한 바닥에서 연주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앙 후방의 저음이 오케스트라 전체를 받쳐주며 각 악기의 음색이 어우러지도록 도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듯, 콘트라베이스를 단단한 무대 후벽 가까이에 놓으면 반사음으로 저음이 보강될 수도 있다. 다만 효과는 벽과의 거리와 재질, 홀의 잔향 등에 따라 달라진다.
인천시립교향악단 말러 교향곡 8번 '천인' 무대 리허설 장면. 콘트라베이스가 목관,금관 악기군의 뒤로 위치하고 있다. / 인천시립교향악단 제공.
인천시립교향악단 말러 교향곡 8번 '천인' 무대 리허설 장면. 콘트라베이스가 목관,금관 악기군의 뒤로 위치하고 있다. / 인천시립교향악단 제공.
이런 배치가 전례 없는 실험은 아니다. 베를린필과 함께 세계 정상급 악단으로 꼽히는 빈 필하모닉도 매년 신년음악회에서 콘트라베이스를 무대 뒤편에 나란히 배치한다. 국내에서는 최수열이 지휘한 인천시립교향악단이 지난 9월 5일 아트센터인천에서 말러 교향곡 8번 '천인'을 연주하며 콘트라베이스를 목관악기 뒤쪽에 배치했다.

이러한 배치는 베를린필도 이미 경험한 방식이다. 피셔는 2022년 이 악단과 말러 교향곡 1번을 연주할 때 콘트라베이스를 목관악기 뒤 중앙에 놓았다. 그러나 당시 무대에 대한 양측의 평가는 달랐다.

피셔에게는 성공적인 선례였다. 그는 VAN 인터뷰에서 당시 연주가 매우 훌륭했으며 악단도 만족했으리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을 다시 초청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판단 아래 공연이 임박해 배치도를 보냈고, 악단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놀랐다고 했다.

그러나 베를린필이 기억하는 연주 여건은 달랐다. 악단은 당시 배치가 음향과 실제 연주 양쪽에서 어려움을 일으켰다고 밝혔다. 콘트라베이스 뒤에 소리를 객석으로 반사해줄 벽이 없어 전체 음향에 영향을 줬고,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사이의 시선 교환도 제한됐다는 것이다. 악단은 이런 이유로 해당 배치를 다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일반적(독일식)인 오케스트라 배치가 적용된 무대. 콘트라베이스가 현악기 군의 오른쪽 끝(첼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 사진 제공. 한경아르떼필하모닉.5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정기 공연 실황.
일반적(독일식)인 오케스트라 배치가 적용된 무대. 콘트라베이스가 현악기 군의 오른쪽 끝(첼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 사진 제공. 한경아르떼필하모닉.5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정기 공연 실황.
시선 교환 문제에는 합주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도 담겨 있었다. 피셔는 "지휘자의 신호가 악장과 각 파트 수석을 거쳐 단원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반응이 늦어지거나 섬세한 표현이 소실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연주자들이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지휘자의 음악적 의도에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반응하는 합주를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단원들이 익숙한 전통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점은 이해한다면서도, 자신의 방식을 받아들이려면 신뢰와 용기, 열린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내 신념을 포기할 수는 없다. 말러의 음악은 내게 너무나 중요하다"고 했다.

이번 갈등은 오케스트라의 예술적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방식도 보여준다. 베를린필은 단원들이 선출한 대표가 예술·조직·인사 관련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자치 운영 전통을 지녔다. 악단 공식 홈페이지는 무대 배치를 결정하는 주체를 지휘자라고 설명하면서도, 이를 조정할 때 악단 대표와 협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히고 있다. 지휘자의 구상을 공연장의 음향과 단원들의 합주 조건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지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한 셈이다.
자신의 인스타그램 채널에 영상을 통해 유감을 표한 지휘자 이반 피셔 / 이반 피셔 공식 인스타그램 채널 캡처.
자신의 인스타그램 채널에 영상을 통해 유감을 표한 지휘자 이반 피셔 / 이반 피셔 공식 인스타그램 채널 캡처.
피셔는 공식 발표가 나온 지난달 29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영상을 올려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 훌륭한 작품의 소리와 통일성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베를린 관객들에게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에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말러 교향곡 5번과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의 공연 영상을 한 온라인 플랫폼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고 안내했다. 자신이 제안한 배치를 적용한 실제 연주를 소개한 것이다.

끝내 접점을 찾지 못한 양측의 이견은 향후 협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 피셔는 같은 영상에서 "앞으로 베를린필과 함께할 계획이 없다며, 자신은 다른 오케스트라에, 베를린필은 다른 지휘자들에게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