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균의 오페라 사회학]
오늘의 눈으로 읽는
100년 전 오페라 이야기
(5) 리하르트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중 '라인의 황금'
지난해 전국 법원에 접수된 상속재산 분할 청구는 3612건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2093건이 접수돼 이 추세라면 처음으로 연간 4000건을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해 상속재산 분할 사건의 84.5%는 소송가액이 1억원 이하였다. 재산을 둘러싼 가족 간 갈등이 일부 자산가 집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갈등이 법정 다툼에서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난 2월 한국경제신문에는 부모가 남긴 34억원의 상속재산을 둘러싼 갈등 끝에 지적장애가 있는 친동생이 숨진 이른바 '왕숙천 사건'이 소개됐다. 1심은 형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항소심은 무죄로 판단했지만 2심에서도 유기치사 혐의는 인정됐다.
재산은 피를 나눈 사이끼리도 화근을 낳는다. '우리 가족의 재산'이라고 부르던 것이 유산이 되어 상속이 시작되는 순간 '내 몫'과 '네 몫'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황금 앞에서 형제마저 서로 등을 돌리는 비극은 157년 전 소개된 오페라에도 등장한다.
157년 전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음악극 '라인의 황금'에도 바로 이런 형제가 등장한다.
거인 형제 파졸트와 파프너는 신들이 살 성 '발할라'를 함께 짓는다. 공사를 마친 뒤 대가로 막대한 황금과 절대반지를 넘겨받는다. 그때까지 둘은 함께 일한 형제이자 동업자였다.
문제는 재산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생긴다. 눈앞의 황금이 '우리의 대가'에서 '내가 가져야 할 몫'으로 바뀌자 상대는 더 이상 형제가 아니다. 파프너는 더 많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결국 파졸트를 죽인다. 재산 앞에서 형제마저 죽인 것이다.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를 쓴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라인의 황금'은 1869년 독일 뮌헨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이어지는 4부작 <니벨룽의 반지>의 출발점이다.
작품 속 황금은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물건이 아니었다. 라인강 깊은 곳에 있을 때는 누구의 것도 아닌 자연의 일부였다. 지하세계의 난쟁이 알베리히가 그것을 훔쳐 세상을 지배할 힘을 가진 반지를 만들면서부터 황금은 '소유해야 할 것'이 된다.
이후 황금과 반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다. 신들의 우두머리 보탄은 알베리히에게서 황금과 반지를 빼앗고, 그것을 발할라를 지은 거인 형제에게 대가로 넘긴다. 황금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누가 더 많이 가질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은 커진다.
알베리히는 반지를 잃으며 저주를 건다. 반지를 가진 사람은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탐하게 되며 결국 죽음까지 부를 것이라는 저주다. 거인형제의 비극은 그 저주가 처음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알베리히가 니벨룽족을 부려 황금과 보물을 모으는 장면. 영국 삽화가 아서 래컴이 1910년 출간된 바그너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 영어판을 위해 그린 삽화. /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하지만 형제를 죽인 것은 반지가 아니다. 파졸트와 파프너는 함께 발할라를 지을 때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막대한 재산을 앞에 놓고 각자의 몫을 따지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달라졌다. 상대의 몫이 줄어야 자신의 몫이 커지는 순간 형제는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쟁자가 된다.
오늘의 상속 분쟁도 이 지점에서 '라인의 황금'과 만난다. 상속재산을 두고 법원에 간다고 해서 모두 탐욕스럽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의 법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가족들 사이에서 재산을 공정하게 나누기 위해 법원의 판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문제는 자신의 몫을 지키는 것을 넘어 다른 가족의 몫까지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까지 하나였던 집과 토지, 예금은 상속 절차가 시작되는 순간 각자의 지분으로 나뉜다. 그 과정에서 오래 묻어둔 서운함과 형제 간 경제력 차이, 부모의 생전 증여 문제까지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도 한다. 재산을 나누는 문제가 과거의 감정까지 끌어내면서 가족관계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다.
바그너가 무대 위에 올린 거인 형제도 다르지 않다. 함께 일할 때는 같은 편이었다. 그러나 재산을 나누는 순간 파졸트의 몫은 파프너가 더 많이 갖는 데 방해가 되는 몫이 된다.
'라인의 황금'이 섬뜩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황금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다. 재산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달라지는 순간 가장 가까운 관계까지 바뀔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바그너는 이 욕망이 더 큰 파국으로 이어질 것도 예고한다. 라인의 황금에서 시작된 반지의 쟁탈전은 이후 발퀴레와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을 거치며 영웅의 죽음과 신들의 세계의 붕괴로 이어진다.
물질과 권력을 향한 욕망이 사랑과 계약, 가족관계를 흔들고 결국 하나의 세계까지 무너뜨리는 4부작의 비극은 파졸트의 죽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황금과 반지를 독차지하기 위해 형 파졸트를 죽이는 동생 파프너. 아서 래컴의 ‘라인의 황금’ 삽화. / 퍼블릭 도메인.Wikimedia Commons
음악도 이 변화에 힘을 보탠다. 작품은 더블베이스의 낮은 E플랫 음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음이 하나씩 더해지며 라인강의 잔잔한 흐름이 만들어진다. 아직 황금에는 주인이 없고 반지도 없다.
그러나 황금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 뒤부터 반지와 저주, 발할라를 상징하는 유도동기(라이트모티프)가 하나씩 등장하면서 음악의 세계도 복잡해진다. 욕망이 개입하기 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가 음악으로 갈라지는 셈이다.
작품 마지막에서 보탄과 신들은 완성된 발할라로 향한다. 무지개 다리가 놓이고 장엄한 음악이 울린다. 얼핏 보면 승리의 장면이다. 그러나 관객은 이미 알고 있다. 그 성의 대가로 오간 황금 때문에 형제가 죽었고, 반지를 둘러싼 더 큰 파국은 이제 막 시작됐다는 사실을.
187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바그너 ‘라인의 황금’. 이 해 처음으로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전곡이 바그너의 구상대로 무대에 올랐다.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올해 국내에서 '라인의 황금'을 직접 만날 기회가 이어진다. 국립오페라단은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작품을 공연한다. '라인의 황금'을 시작으로 2029년까지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전막을 자체 제작해 선보이는 프로젝트다.
12월에는 음악감독 정민이 이끄는 강릉시립교향악단도 '라인의 황금'을 시작으로 4년에 걸쳐 링 사이클에 도전한다. 한국 음악가와 제작진이 중심이 되는 '국내산 반지' 프로젝트다.
157년 전 바그너가 그린 황금을 갈구하는 인물의 욕망은 오늘의 상속 분쟁 사건과도 묘하게 닮아 있다.
"인간의 욕망 앞에서 가족에게 남겨진 재산은 함께 나눌 유산인가, 서로의 몫을 가르는 순간 갈등의 씨앗이 되는가."
조동균 기자
100~200년 전 탄생한 명작 오페라에는 오늘의 사건사고를 보는 듯한 비극이 담겨 있습니다. 스토킹과 교제살인, 빈곤과 계급 갈등, 가짜뉴스와 권력 남용까지. <오페라 사회학>은 시대를 넘어 반복되는 인간 사회의 비극과 모순을 오페라로 읽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