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 제공. 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 제공. 국립오페라단
원작의 충실한 재현 대신 연출가의 재해석을 내세우는 ‘레지테아터(Regietheater)’는 익숙한 고전에서 동시대적 질문을 끌어내는 유용한 도구다. 그러나 연출의 구상이 음악과 서사의 고유한 미학을 압도하는 순간, 오페라가 가진 본연의 몰입감은 쉽게 흔들린다.

지난 29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한 국립오페라단의 바그너 <라인의 황금>은 레지테아터가 지닌 가능성과 한계를 극명하게 동시에 드러낸 무대였다. 이번 공연은 국립오페라단이 장기 프로젝트로 추진하는 바그너 4부작 <니벨룽의 반지>의 첫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베일을 벗은 첫 무대는 신화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하는 음악적·서사적 개연성보다 연출가의 직관적 이미지가 지나치게 앞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국립오페라단,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 제공. 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 제공. 국립오페라단
자본과 욕망의 번역, 메시지에 치인 시각적 장치들

연출을 맡은 로렌조 피오로니는 신화 속 고대의 비극을 21세기 자본주의의 비루한 현실로 강렬하게 번역하고자 했다. 라인의 황금은 노란색 5만원권 지폐 다발로 변했고, 신들의 성 발할라 입성은 부동산 자산가들의 새집 입주 파티처럼 펼쳐졌다. 무대 화면에는 롯데월드타워를 비롯한 현대 도시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교차했다. 첫 장면의 알베리히는 허름한 여관방에서 벼룩을 잡는 노숙인으로, 라인의 세 처녀는 퇴폐적인 숙박업소 장기 투숙객의 이미지로 직조됐다.

사랑을 포기한 자가 화폐를 통해 권력을 쥔다는 설정은 직관적이었으나, 지나치게 일차원적이고 강렬한 시각적 장치들은 오히려 관객이 음악을 통해 인물의 감정 변화를 추적할 여지를 자르고 들어왔다. 객석 뒤편에서 '탐욕은 그만'이라는 피켓과 촛불을 들고 등장한 시위대 장면 역시 바그너 음악극이 축적해 온 중후한 긴장감을 끊어뜨리는 산만한 장치에 그쳤다.

한국적 요소의 결합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거인 형제의 나막신이나 단군신화의 '웅녀'를 상징하기 위해 가채를 쓰고 곰 인형 탈을 든 대지의 여신 에르다의 등장은, 상징의 시각적 나열을 넘어 음악극 내에서 독자적인 개연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동시대적 메시지를 빽빽하게 채워 넣었지만, 정작 4부작 전체를 관통해야 할 해석의 일관성과 구조적 완성도는 희미해졌다.
국립오페라단,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 제공. 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 제공. 국립오페라단
무대의 산만함을 지운 단 하나의 축, 사무엘 윤

이처럼 과잉된 연출의 파도 속에서 중심을 잡고 무대를 예술적 긴장감으로 채운 것은 알베리히 역의 바리톤 사무엘 윤이었다. 바이로이트 축제를 사로잡았던 그의 저력은 가창과 연기 모두에서 압도적이었다. 쏟아지는 시각적 자극 속에서도 그는 인물의 비틀린 욕망과 절망을 정밀하게 조율해 냈다.

특히 반지를 빼앗긴 직후 “이제 나는 자유인가(Bin ich nun frei)?”라고 부르짖으며 쏟아낸 저주의 장면은 단연 이날 공연의 정점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온 상실과 분노는 단순한 악인의 부르짖음을 넘어 무대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위협으로 번져 나갔다. 그가 퇴장한 후에도 무대에 짙게 남아있던 저주의 잔향은 왜 그가 세계적인 '바그너 가수'인지를 완벽히 증명했다.
국립오페라단,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 제공. 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 제공. 국립오페라단
다른 주요 배역의 성적은 고르지 않았다. 보탄 역의 올렉산드르 푸슈냐크는 신들의 왕이 지녀야 할 성량적 존재감이 충분하지 않았다. 객석에 전달되는 소리의 규모와 장악력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 서울 공연은 그의 보탄 배역 데뷔다. 배역 데뷔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이날 무대에서는 그를 보탄으로 초청한 선택의 설득력을 충분히 확인하기 어려웠다.

로게 역 조너선 스토턴 역시 음성의 안정감에서 아쉬웠다. 재치와 기민함으로 사건을 움직이는 인물이지만, 성대 결절을 우려할만한 가창 장면의 불안한 소리가 인물의 존재감을 약화시켰다.
국립오페라단,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 제공. 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 / 제공. 국립오페라단
다행히 거인 형제 역의 류지상(파졸트)과 김대영(파프너)은 안정적인 음색으로 무게중심을 잡았고, 에르다 역의 이단비는 풍부한 성량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지휘자 로타 쾨닉스가 이끈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장대한 서사를 차분히 풀어갔으나, 바그너 특유의 황홀한 에너지를 뿜어내야 할 금관군을 비롯해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할 오케스트라의 정교한 완력은 다소 부족했다.

현대적인 이미지를 무대 위에 쏟아놓는다고 해서 작품의 동시대적 깊이가 저절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라인의 황금>으로 첫발을 뗀 국립오페라단의 반지 여정이 성공적인 대서사시로 완주하기 위해서는, 개별 장면의 파격에 기대기보다 음악과 서사를 잇는 긴밀한 개연성에 대한 한층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