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호의 '헤리티지 #7_4_1'(2024). 눈 내린 덕수궁 선원전 터의 회화나무 뒤에 흰 캔버스를 세우고 찍었다. /갤러리현대 제공
이명호의 '헤리티지 #7_4_1'(2024). 눈 내린 덕수궁 선원전 터의 회화나무 뒤에 흰 캔버스를 세우고 찍었다. /갤러리현대 제공
이명호(51)가 찍은 사진 속 나무 한 그루 뒤에 거대한 흰 캔버스가 서 있다.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그는 크레인까지 동원해 나무가 선 자리에 임시 촬영장을 차렸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처럼 흰 배경으로 뒤를 가린 덕분에, 관객들은 무심코 지나치던 나무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이명호는 이 '나무' 연작을 2004년부터 20년 넘게 이어 오며 국내외에 이름을 알렸다. 영국 헤이워드갤러리와 호주 빅토리아국립미술관 등의 기획전에 참여했고, 미국 게티미술관과 프랑스 국립도서관, 루이비통재단,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no)thing'은 그가 이 화랑에서 8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근작 30여 점이 전시장에 나왔다. 태평양 섬나라 키리바시, 덕수궁 회화나무를 각각 찍은 두 연작이 중심이다.

'키리바시(Kiribati)' 연작의 무대는 적도 부근의 섬나라 키리바시다.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땅과 주민들의 삶터가 바다에 잠길 위기에 놓인 곳이다. 작가는 현지 주민들의 손을 빌려 야자 섬유를 쓰러진 나무에 듬성듬성 엮어 반투명한 가림막을 만들었다. 1층에 걸린 대표작에서는 바다와 맹그로브 나무가 이 가림막에 반쯤 가려져 있다.
이명호의 '키리바시 #1_1_1'(2026). 야자 섬유로 엮은 가림막 너머로 맹그로브 나무가 보인다. /갤러리현대 제공
이명호의 '키리바시 #1_1_1'(2026). 야자 섬유로 엮은 가림막 너머로 맹그로브 나무가 보인다. /갤러리현대 제공
이명호의 '키리바시 #1_2'(2026). 인화한 사진 속 맹그로브 나무를 칼로 긁어냈다. /갤러리현대 제공
이명호의 '키리바시 #1_2'(2026). 인화한 사진 속 맹그로브 나무를 칼로 긁어냈다. /갤러리현대 제공
사진 속 피사체를 칼로 긁어 지운 작품들을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인화한 키리바시 사진에서 맹그로브 나무와 수평선을 직접 긁어 들어냈다. 수술용 메스와 건축용 나이프를 썼다. 긁힌 자국만 남은 빈자리로 인해 나무의 존재감은 더 선명해졌다.

2층의 '헤리티지(Heritage)' 연작은 덕수궁 선원전 터의 회화나무를 담았다. 선원전은 조선 왕들의 초상화(어진)를 모시던 건물로, 1919년부터 일제가 헐기 시작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회화나무는 그 터에서 약 250년을 살아온 나무다. 작가는 계절과 날씨를 바꿔 가며 이 나무를 찍었다. 나무를 긁어내 온전한 사진과 나란히 걸기도 했다. 갤러리현대 전시는 12월 20일까지.
이명호의 '나무 #20'(2026). 사진 속 나무를 칼로 긁어낸 신작이다. /갤러리현대 제공
이명호의 '나무 #20'(2026). 사진 속 나무를 칼로 긁어낸 신작이다. /갤러리현대 제공
서울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에서도 그의 개인전 '장막과 장면 사이 혹은 너머'를 볼 수 있다. 근작 중심인 갤러리현대 전시와 달리 사비나미술관 전시는 지난 20여 년 작업을 되짚는다. 작품 59점이 나왔고 작가가 작업 구상을 정리한 개념도도 처음 공개됐다. 사비나미술관 전시는 12월 13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