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돈 벌려다 '손짓 발짓'…외국인 뽑는 남자의 이중생활 [권용훈의 직업불만족(族)]
영어를 써서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함께 일하게 된 브라질 모델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외국인 모델을 데려와 광고와 패션 무대에 세우는 김재운 플래티늄 매니지먼트 대표(사진)의 창업 초기 이야기다. 말 대신 손짓과 몸짓이 오갔다. 사람을 연결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서로 말부터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모델 회사로 커졌다. 고향 강원 철원에는 국숫집도 열었다. 서울에서는 광고주에게 어울리는 얼굴을 찾고, 철원에서는 관광객에게 내놓을 한 끼와 쉴 자리를 고민한다. 일터가 늘어난 만큼 책임질 사람도 많아졌다.

통역 아르바이트에서 발견한 사업 기회

김 대표가 광고 현장에 발을 들인 계기는 통역 아르바이트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면서 외국인 모델 통역 일을 시작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에게는 영어를 배우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이었다.

촬영장을 드나들면서 통역 너머의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광고주는 원하는 얼굴을 찾았고, 모델은 자신을 써줄 광고주를 기다렸다. 둘 사이를 연결할 사람이 필요했다. 국내 기업의 해외 사업이 커지면 외국인 모델을 찾는 수요도 늘 것이라고 봤다.
플래티늄 매니지먼트가 홈페이지에 소개한 주요 협업 기업과 브랜드. 삼성·LG·현대자동차·무신사 등이 포함돼 있다. /플래티늄 매니지먼트 홈페이지 캡처
플래티늄 매니지먼트가 홈페이지에 소개한 주요 협업 기업과 브랜드. 삼성·LG·현대자동차·무신사 등이 포함돼 있다. /플래티늄 매니지먼트 홈페이지 캡처
모델 섭외와 계약, 광고 제작 과정을 익힌 그는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이후 제일기획과 넷플릭스 등을 고객사로 확보하며 광고와 영상 콘텐츠로 모델들의 활동 무대를 넓혔다.

2000년대 초부터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해외로 진출하는 속도가 빨라지자 그에게 기회가 됐다. 한국에서 촬영한 광고가 해외로 나가면 모델도 자신의 경력을 넓힐 수 있었다. 김 대표는 일찌감치 한국 광고 시장을 외국인 모델들이 좋은 사진과 영상을 남길 수 있는 기회의 무대라고 봤다.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과 외국인 모델의 활동 무대 확대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해서다.
김재운 플래티늄 매니지먼트 대표가 2000년대 초 영국에서 외국인 모델을 구하기 위해 길거리 캐스팅을 하던 모습.
김재운 플래티늄 매니지먼트 대표가 2000년대 초 영국에서 외국인 모델을 구하기 위해 길거리 캐스팅을 하던 모습.

완성된 얼굴보다 성장할 가능성을 본다

말도 통하지 않던 브라질 모델은 함께 생활하고 일하면서 한국에 적응했다. 영어 실력도 늘었고, 광고 계약을 맺은 데 이어 처음으로 패션쇼 무대에도 올랐다. 김 대표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외국인 모델을 고르는 기준을 배웠다. 당장 일을 잘하는지도 중요하지만, 기회를 줬을 때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 대표를 거친 모델 중에는 방송과 드라마를 통해 얼굴을 알린 이들도 있다. MBC에브리원 예능 ‘대한외국인’에 출연한 일본인 모델 모에카가 대표적이다. 프랑스 청춘 드라마 ‘스캄 프랑스’에서 엘리엇 역을 맡은 모델 겸 배우 막성스 다네포벨도 신인 시절 한국에서 함께 일했다. 김 대표에게는 광고 촬영장에서 만난 신인이 해외에서 배우로 성장한 사례다.

러시아 출신 모델 엘아이는 열네 살에 부모와 한국을 찾았을 때 눈여겨봤다. 반듯한 이목구비보다 다른 모델과 구별되는 개성에 주목했다. 브라질 출신 모델 마리아는 싸이의 ‘나팔바지’ 뮤직비디오와 KEB하나은행 광고 등에 출연했다. 모델마다 생김새와 개성, 잘 맞는 무대가 달랐다.
터키 출신 예술가 가립아이. 사진=SK이노베이션
터키 출신 예술가 가립아이. 사진=SK이노베이션
찾는 사람이 반드시 패션모델인 것도 아니다. SK이노베이션 광고에 등장한 예술가 가립아이를 섭외한 것도 그의 작업이었다. 김 대표는 "광고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맞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며 "국적이나 외모만으로 캐스팅이 끝나지 않다"고 했다.

일이 끝난 뒤에도 남는 인연이 있다. 폴란드 출신 모델 요안나는 한국어를 공부해 직접 쓴 한글 감사 편지를 건넸다. 자신을 도운 박상진 매니저의 성을 따 ‘박화영’이라는 한국 이름도 지었다. 광고 계약서로 시작한 관계가 계약 기간 밖으로 이어진 것이다.
김재운 플래티늄 매니지먼트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2018년께 열린 워크숍에서 소속 외국인 모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재운 플래티늄 매니지먼트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2018년께 열린 워크숍에서 소속 외국인 모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광고주와 모델 사이에 남는 사람

물론 사람을 알아보는 눈만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는 없다. 모델이 마음에 들어도 계약 조건이 맞지 않으면 광고에 나갈 수 없다. 김 대표는 "계약을 맺어도 일정과 현장을 챙기고, 촬영이 끝나면 정산이 남는다"며 "광고에서 모델의 얼굴이 등장하는 시간은 짧지만, 그 얼굴을 카메라 앞에 세우기까지의 일은 길다"고 말했다.

말이 통한다고 일이 풀리는 것도 아니다. 시간 약속부터 업무 지시, 계약 조건까지 서로 당연하게 여기는 기준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평범한 요구가 누군가에게는 낯설거나 무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모델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광고주에게도 이해만 부탁할 수는 없다. 양쪽 이야기를 듣다 보면 김 대표가 가운데 남는다. 그는 이 직업에서 가장 힘든 일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꼽았다.

일감이 줄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기업이 광고비를 줄이면 모델이 설 무대도 줄어든다. 그렇다고 회사 운영비까지 함께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자기 수입만 걱정하면 되는 일도 아니다. 직원과 모델의 생활이 걸려 있다. 그는 “회사의 어려움이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무겁게 느낀다"고 했다.
김재운 플래티늄 매니지먼트 대표가 2018년께 열린 워크숍에서 소속 외국인 모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재운 플래티늄 매니지먼트 대표가 2018년께 열린 워크숍에서 소속 외국인 모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울에선 캐스팅, 철원에선 국수와 카페도

서울에서 모델 매니지먼트 회사를 키운 김 대표는 고향 철원에서도 사업의 가능성을 찾았다. 계기는 한탄강 주상절리길을 찾는 관광객이었다. 관광지를 둘러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역에서 식사하고 쉬어갈 곳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철원에서 태어나 자란 그에게는 고향에 자신의 일터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문을 연 곳이 오대쌀 등 철원의 특산물을 활용한 드르니국수와 카페 바잘트38.1이다. 관광객의 발길을 식사와 휴식, 지역 안의 소비로 이어보려는 시도였다.

음식점 운영은 모델 회사를 키운 경험만으로 풀리지 않았다. 모델 매니지먼트가 여러 차례 협의와 준비를 거쳐 결과를 내는 일이라면, 음식점은 한 끼를 내놓을 때마다 평가를 받는 일이었다. 음식 맛뿐 아니라 응대와 대기시간까지 챙겨야 했다. 한 번 손님을 모으는 것과 다시 찾아오게 하는 것도 다른 문제였다.

그는 "광고주에게 다음 광고를 맡기고 싶은 회사로 남아야 하듯, 식당도 다음에 또 들르고 싶은 곳이 돼야 했다"며 "계약 한 건을 따내거나 국수 한 그릇을 파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그다음 선택을 받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일터가 두 곳이 되자 퇴근은 더 어려워졌다. 서울 일을 마쳤다고 철원 일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현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결국 대표가 판단해야 한다. 그만큼 가족과 보내는 시간과 혼자 쉴 여유는 줄었다.
사진=철원군청
사진=철원군청

모델에겐 무대, 고향 후배들에겐 장학금을

그의 애향심은 사업으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김 대표는 2018년부터 철원 지역 인재를 위한 장학금 기부를 이어왔다. 2021년에는 장학금 2000만원과 철원 홍보영상을 기부했다. 2022년에도 장학금 1000만원을 전달했다. 같은 해 플래티늄 임직원 35명도 10만원씩 모아 고향사랑기부금 350만원을 냈다. 그가 철원군에만 기부한 금액은 이미 1억원을 넘었다.

다시 선택해도 같은 일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김 대표는 “그렇다”고 답했다. 영어를 써서 돈을 벌고 싶었던 청년은 이제 자신이 번 돈의 일부를 고향 후배들의 미래에 보탠다. 그는 “청년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꿈을 키워갈 수 있는 사회적 디딤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어로 돈 벌려다 '손짓 발짓'…외국인 뽑는 남자의 이중생활 [권용훈의 직업불만족(族)]
#직업불만족(族) 편집자주
'직업불만족(族)'은 직업의 겉모습보다 그 안에 담긴 목소리를 기록합니다. 당신의 평범한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겐 깊은 위로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일하며 살아가는 세상 속 모든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하단 구독 버튼을 눌러주시면 직접 보고 들은 현직자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