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봉의 호모 인베스티쿠스] 폭락도, 폭등도 다 좋다…주식 기사는 무엇을 파는가
10월 같은 주에 “코스피 내년 최대 9300 간다”와 “코스피 5000까지 밀릴 수도”라는 기사가 나란히 올라왔다. 전자는 멀리 내다본 희망을 걸었고, 후자는 코앞의 불안을 강조했다. 두 기사는 서로 충돌하기보다 짝을 이루는 편이다. 겁먹은 투자자도, 싸진 값에 고무된 투자자도 모두 제 몫의 기사를 받아 든다. 어떤 기사는 아예 한 제목 안에 둘을 함께 담기도 한다. “코스피 4800선 하락 가능성에도 HBM 수요 견조”.

투자자에게 중요한 것이 시장의 방향이라면, 기사에 중요한 것은 진폭이다. 관심을 파는 사람에게 폭락은 폭등만큼 좋은 소재다. 기운 빠진 장에는 박카스 같은 위로를 내밀면 된다. “사상 최대 실적에도 고꾸라진 삼전닉스…증권가는 ‘역사적 저평가’”. 하락이 길어지면 더 센 강장제를 건넨다. “‘하닉 470만, 삼전 67만 간다’…파격 전망 내놓은 노무라의 분석”. 물론 드라마 없는 횡보장이라면 창의적인 소재 발굴로 관심을 자극한다.

증권 관련 기사는 뜻밖의 임무도 떠맡는다. 투자자의 마음을 돌보는 일이다. 분노, 낙담, 기대, 불안을 읽고 거기에 맞는 제목을 뽑아야 반응이 온다. “정말 피가 마릅니다”는 고통을 알아준다는 인정이고, “역사적 저평가”는 아직 희망이 있다는 다독임이다. “코스피는 왜 글로벌 ATM이 됐을까?”는 범인을 지목해 준다.

“16만 계좌에서 2조 원이 사라졌다”도 같은 일을 한다. 돈은 사라지지 않았다. 평가액이 줄었을 뿐이고, 그 값에 주식을 판 사람도 반대편에 있다. 그러나 ‘사라졌다’는 표현과 동시에 시장의 가격 변동은 실종 사건이 되고 만다. 실종 사건에는 피해자가 생기고, 피해자가 있으면 가해자를 찾게 된다. 공분은 또 다른 방법의 투자자 위로다. 친밀감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기사는 응원단장 노릇도 한다. 때론 주식시장을 국가대표 경기처럼 중계한다. “미·일·대만 증시 달리는데…코스피만 뒷걸음”, “대만에 이어 나이지리아까지…점점 외면받는 코스피”. 지수는 나라의 성적표가 되고 투자자는 서포터즈가 된다. 경쟁과 자부심으로 투자자의 단합까지 도모한다. 시장이 좋을 때는 “뉴욕 택시기사도 코스피 얘기”가 뿌듯하게 걸린다. 월가에 전해지는 구두닦이 소년 일화는 같은 장면을 과열의 경고로 읽었다. 지수가 정책 목표와 공약의 숫자가 된 뒤로, 시장 민심은 말 그대로 정치의 언어가 됐다.

과장된 화법과 흥행주의 제목만의 문제가 아니다. 폴 테틀록은 월스트리트저널 시황 칼럼의 어조가 비관적일수록 다음 날 주가가 내렸다가 며칠 안에 되돌아오는 경향을 찾아냈다. 기사가 실어 나른 것은 정보보다 낙관과 비관의 기분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브래드 바버와 테런스 오딘은 개인투자자가 뉴스에 오른 종목을 몰아서 산다는 것을 밝혔다. 수천 개 종목을 다 따져 볼 수 없는 개인의 장바구니에는 기사에 등장한 종목이 담기기 십상이다. “국장 팔고 미장 산다” 같은 기사도 현상 전달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 시작된 이동에 속도를 붙일 수 있다.

언론에게 최악은 시장의 폭락이 아니라 관심의 소멸이다. 투자자들이 시장 자체를 떠나, 더는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를 대신 표출하는 기사도, 부풀린 전망으로 건네는 위안도 사람들을 시장 언저리에 붙잡아 두는 데 쓰인다.

그 사이 사라진 것은 “아직은 알 수 없다”, “오늘 시장, 별일 없었다” 같은 정직한 말이다. 가장 정확한 시황 기사는 아마 그런 제목을 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사는 쓰이지 않는다. 아무도 누르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