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BCG가 분석한 한 대형 소비재 기업은 과거 연간 약 500개의 마케팅 콘텐츠를 제작했다. 그러나 오늘날 소비자가 브랜드를 만나는 경로에 같은 수준으로 대응하려면 수백만 개의 콘텐츠가 필요하다. 소비자가 구매 과정에서 경험하는 접점도 10년 전 5개 안팎에서 지금은 15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단순한 채널 증가가 아니다. 평균 고객을 전제로 한 표준화의 경제성이 약해지고 있다는 신호다.

[비즈니스 인사이트] 평균이 사라진 시장, 달라진 성장 전략
이 변화는 한국 내수 시장에서도 나타난다. 같은 소비자도 품목과 상황에 따라 절약과 프리미엄 소비를 오간다. 연령과 소득만으로 고객을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글로벌 시장도 한 덩어리로 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국가마다 통상정책과 산업정책, 규제와 소비행태가 달라지면서 같은 제품과 사업모델에도 서로 다른 대응이 요구된다. 내수에서는 ‘평균 고객’이, 글로벌에서는 ‘평균 시장’이 희미해지고 있는 셈이다.

규모의 경제를 잠식하는 복잡성

문제는 이런 차이가 커질수록 함께 늘어나는 복잡성의 비용이다. 기업은 시장별 차이에 대응하며 제품과 운영의 상당 부분을 표준화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해왔다. 그러나 고객의 수요부터 국가별 규칙까지 시장을 가르는 변수가 늘어나면, 같은 매출을 올리기 위해 기업이 감당해야 할 복잡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이런 변화가 뚜렷하다. 같은 제품과 사업모델도 시장에 따라 규제와 공급망, 가격, 유통 전략을 달리 설계해야 하는 시대다. 시장은 잘게 나뉘는데, 각 시장을 공략하는 비용은 줄지 않는다. 시장의 외연을 넓히는 것만으로 성장을 담보하기 어려워진 이유다.

AI가 바꾸는 스몰 마켓의 경제학

AI가 바꾸는 것은 바로 이 비용 구조다. 지금까지 AI의 가치는 주로 생산성과 자동화로 설명돼 왔다. 그러나 시장별 차이가 커지는 시대에는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AI가 기업이 경제성 있게 상대할 수 있는 시장의 최소 단위를 어디까지 낮출 수 있는가다. 내수에서는 고객의 행동과 맥락을 세밀하게 읽고 상품과 가격, 메시지를 달리 설계할 수 있다. 글로벌에서는 국가별 수요와 경쟁구도, 규제 및 유통 환경을 분석하고 현지화하는 비용을 낮출 수 있다.

이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최근 BCG가 대형 소비재 기업을 조사한 결과, 27%는 생성형 AI와 디지털 도구로 초현지화 실행 비용을 낮추며 현지화를 확대하고 있다고 답했다. AI 기반 마케팅 혁신 기업에서는 마케팅 투자수익률이 최대 50% 높아지고 관련 비용이 최대 20% 줄어든 사례도 나타났다. AI가 바꾸는 것은 단순한 작업 속도가 아니라, 과거에는 규모가 작아 수지가 맞지 않던 고객과 시장을 사업으로 검토할 수 있는 손익분기점이다.

그렇다고 모든 작은 시장이 매력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선택 가능한 시장이 늘어난 만큼 어디에 자본과 역량을 투입할지에 대한 판단은 더 중요해진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AI를 통해 어떤 수요의 경제성이 새롭게 성립하는지를 봐야 한다.

한국 기업에는 더 큰 기회 될 수도

한국 기업에는 이 변화가 특히 중요하다. 내수의 한계를 넘어 일찍부터 해외 생산과 판매 기반을 구축해온 만큼, 이미 확보한 글로벌 기반에서 지금까지 규모와 비용 때문에 놓쳤던 수요를 다시 보는 것이 새로운 성장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시장을 보는 단위부터 바꿔야 한다. 국가나 권역의 전체 규모만 볼 것이 아니라, 같은 시장 안에서도 고객·채널·가격대별로 숨어 있는 수요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동시에 모든 것을 현지화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규모의 경제를 유지할 영역은 표준화하되, 고객 인사이트와 상품 구성, 가격, 마케팅처럼 시장별 차이가 성과를 좌우하는 영역에는 AI를 활용해 정교하게 대응해야 한다.

무엇보다 AI를 기존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 도구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규모가 작아 지나쳤던 수요를 찾아내고, 시장성을 검증해 실제 상품과 서비스로 연결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 AI가 넓혀주는 것은 효율화의 범위가 아니라 기업이 사업화할 수 있는 수요와 시장의 범위다.

평균적인 고객도, 하나의 세계시장도 희미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성장의 공간까지 작아진 것은 아니다. 기회가 더 작고 다양한 시장으로 흩어졌을 뿐이다. AI 시대의 승부는 가장 큰 시장을 차지하는 데서만 갈리지 않는다. 남들이 지나치는 작은 수요까지 경제성 있는 시장으로 바꾸는 기업이 새로운 성장의 경계를 넓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