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서 한 장으로 풀 수 없는 '모를 권리'…유전체 검사, 공론화가 먼저다
최근 한 희소 질환 검사 지원 사업의 협약서를 검토할 일이 있었다. 특정 질환이 의심되는 어린이에게 2만 개 유전자를 한꺼번에 읽는 전장엑솜검사를 무상 제공하는 사업이었다. 원인 유전자 몇 개만 보면 되는 진단에 전장 검사를 쓰는 이유는 검사기관에 데이터가 남기 때문이다. 협약서는 검사기관이 법에 따라 10년간 검사 결과를 보관한다는 점을 들어 보호자가 동의하면 별도의 의사 지시 없이도 해당 기관의 방침에 따라 아이의 유전체를 재분석할 수 있다고 적고 있었다.

보호자가 동의했으니 문제없다고 할지 모르나 유전체 검사는 통상의 검사와 다르다.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진단하고, 검체의 주인만이 아니라 가족의 질환까지 드러낸다. 우연히 발견되는 질환은 대부분 치료제가 없거나, 지금은 무증상이지만 언젠가 발병할지 모르는 것이다. 어디까지 판독하고 알릴 것인가, 재분석은 누가 무엇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 아이가 성인이 된 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등은 아직 사회적으로 논의하지 못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동의하는 당사자 개인이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법이 있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있으나 미흡하다. 생명윤리법은 검사기관의 신고, 동의서의 서식, 검체의 폐기, 기록의 보존 같은 절차를 정한다. 그러나 보존할 ‘결과’가 보고서 한 장인지 유전체 데이터 전체인지, 어떤 소견을 알려야 하는지, 가족에게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지는 정하지 않았다. 절차를 정한 법은 내용을 묻는 말에 답하지 못한다. 동의서 한 장으로 적법해질 수는 있어도 정당해지지는 않는다.

신생아 전장 유전체 선별검사가 가장 걱정스럽다. 정부 예산으로 이미 시작했고 연구자들은 동의서 한 장을 면죄부처럼 들고 있지만, 결과가 주는 고통은 온전히 부모의 몫이다.

영국은 신생아 10만 명의 유전체를 분석하는 연구를 하고 있지만, 연구에 앞서 시민과 환자 가족이 참여하는 국가 차원의 공론화 과정을 거쳤고, 치료법이 있는 소아기 발병 질환 200여 개로 대상을 좁힌 뒤에야 연구를 시작했다.

독일은 2010년 유전자 진단법으로 유전자 검사를 의사에게만 허용하고 예측검사 전후 상담을 의무화했으며, 동의 능력이 없는 아이는 본인의 질병 예방·치료에 필요할 때만, 집단 선별검사는 치료 가능한 질환만 위원회 심의를 거쳐 시행하도록 했다.

사회가 허용의 경계를 먼저 정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우리는 거꾸로다. 다른 나라가 하니 예산부터 편성해 연구를 시작했고 공론화가 없는 사이에 증상 없는 유전체 질환 확진자가 생겨나고 있다.

우리에게는 강한 가족문화도 변수다. 자녀의 검사 결과는 부모 중 누구에게서 유전됐는지를 알려준다. 이 결과는 형제자매의 결혼과 출산에 영향을 미친다. 혈연이 사회적 자원인 나라에서 그 파장은 보호자 한 사람의 자기결정권으로 무마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결정이 가족 전체의 모를 권리를 침해한다. 서구의 동의 모델을 가져와 자율적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문화에 맞지 않는다.

정부와 민간의 근거없는 유전체 검사 지원·연구 사업을 멈춰야 한다. 어떤 소견을 알릴 것인가, 데이터를 누가 얼마나 보관하고 무엇에 쓸 것인가, 가족에게 알릴 의무와 모를 권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우리 사회의 원칙을 먼저 합의하고, 그에 근거한 규제체계를 세운 뒤 검사를 확대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검사 예산이 아니라 환자와 가족, 의료인과 시민이 원칙을 세우는 공론화 예산이다. 먼저 하면 되돌릴 수 없다. 연구를 위해 가족이 파괴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