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락 칼럼] '인간 vs 로봇' 격투, 그다음은
인간 복싱이 퇴출되고 거대한 강철 로봇들이 링 위에서 격투를 벌이는 시대. 영화 ‘리얼 스틸’(2011)이 그린 미래다. 휴 잭맨이 연기한 전직 복서 찰리는 아들과 함께 버려진 로봇 아톰을 훈련시켜 강자들에게 도전한다. 키 2.5m, 몸무게 900㎏에 달하는 육중한 로봇들의 싸움. 링 밖에서 찰리가 주먹을 뻗으면 아톰은 동작을 그대로 따라 펀치를 날린다. 액션의 통쾌함을 넘어 인간과 기계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지난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인간 vs 휴머노이드’ 격투 경기. 영화 속 장면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했다. 미국 스타트업 REK(로봇엔터테인먼트컴뱃)가 주최한 이벤트에서 중국 엔진AI가 제조한 T800 로봇이 강력한 왼발을 날리자 92㎏ 체구의 인간 선수(프랭키 라페나)가 격투장 바닥에 나뒹굴었다. 라페나는 3종의 로봇과 번갈아 대결해 2승1패를 거뒀다. 종합 전적에서 인간이 승리했지만 로봇이 사람을 직접 타격하는 장면은 놀라움과 함께 섬뜩함마저 안겼다.

이날 경기장에 오른 로봇은 사람이 가상현실(VR) 기기로 원격 조종했다. 로봇 스스로 판단해 인간을 공격한 것은 아니지만 경기 장면을 보면 묘한 불쾌감이 다가왔다. 라페나는 “로봇은 지치지 않는다. 쓰러져도 계속 일어난다”며 혀를 내둘렀다. 만약 AI 로봇이 자율적 판단으로 인간을 공격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제1원칙’(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최근 뜨겁게 달아오른 ‘AI 종말론’도 떠올랐다. 세계적인 AI 석학 사이에서도 종말론에 대한 견해는 첨예하게 갈린다. 딥러닝의 대부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교수,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 등은 안전장치 없는 AI 개발이 통제 불능으로 이어져 인류의 파국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AI 위험성을 지적하며 법적·기술적 안전장치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다.

반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AI가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일축한다. 공포에 휘둘린 과도한 규제가 혁신을 가로막고 AI가 가져올 혜택을 놓칠 수 있다는 논리다. 앤드루 응 스탠퍼드대 교수도 “AI의 인류 위협을 걱정하는 것은 화성에서의 인구 과잉을 걱정하는 것”이라며 종말론의 허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AI 종말론이라는 극단적 시나리오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나친 공포에 빠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통제력 부재’가 가져올 위험은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AI 성능이 빠르게 향상되고 물리적 능력까지 갖춘 휴머노이드가 개발되는 시대다. 기술이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안전장치는 갖춰야 한다. 로봇 개발이 윤리적 울타리를 뛰어넘는 순간, 격투장에서 인간을 쓰러뜨린 발차기는 실질적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한국은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등에서 세계적 제조 경쟁력을 갖춘 국가다. ‘피지컬 AI’와 결합해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분야다. 피지컬 AI의 궁극적 형태가 될 미래 휴머노이드 시장도 한국이 기술 주도권을 노려볼 만한 분야다. 인간처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로봇은 인류에 큰 혜택을 줄 수 있지만 예상치 못한 위험도 무시할 수 없다. 기업의 개별적 대응을 넘어 국제적으로 합의된 안전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유엔 과학패널은 “AI 위험을 완전히 규명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며 예방 원칙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도 이 같은 논의에 적극 참여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는 만큼 미래 규범을 세우는 일에도 뒤처져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