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인프라의 최대 병목으로 꼽혀온 전력기기주가 맥을 못 추고 있다. 고전압 변압기와 배전반이 부족해 데이터센터를 제때 가동하지 못할 만큼 수요가 넘치지만, 정작 전력기기 제조사의 실적 전망과 목표주가는 낮아지고 있다. 수주 물량을 매출로 전환하는 속도가 예상보다 더뎌진 영향이다.
◇3분기 실적 기대 이하 전망
9일 기준 효성중공업과 HD현대일렉트릭 주가는 최근 한 달간 각각 14.9%, 19.3% 하락했다. LS일렉트릭도 7.6% 내렸다. 모두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 하락률(-6%)보다 낙폭이 컸다.
주가 약세의 주요 원인은 시장 기대에 못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3분기 실적이다. NH·대신·하나·유안타·다올투자증권은 효성중공업의 3분기 영업이익을 2961억~3128억원으로 추정했다. 전년 동기보다 35% 안팎 늘어난 규모지만, 모두 시장 컨센서스(3280억원)를 밑돈다. 미국·이란 전쟁 여파로 중동 프로젝트 납기가 밀린 데다 최대 시장인 북미에서도 설치가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요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미국의 전력 변압기 평균 납기는 128주, 발전소용 승압 변압기는 144주까지 늘었다. 주문부터 인도까지 2년 반 이상 걸린다는 뜻이다. 미국 초고압 변압기 시장 점유율 1위인 효성중공업을 비롯해 국내 전력기기 ‘빅3’는 향후 4~5년치 수주 물량을 확보한 상태다.
문제는 수주 물량이 매출로 인식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대형 전력기기는 현장 설치와 검수까지 마쳐야 매출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데이터센터 건설을 둘러싼 주민 반발이 커지면서 미국 일부 주에서는 인허가가 지연되고 있다. 설치가 늦어지면서 실적 반영 시점도 밀리는 것이다.
증권사들은 전력기기주의 눈높이를 잇달아 낮췄다. 대신증권은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데이터센터 건설 반대와 규제 강화 우려로 초고압 변압기 수주 성장 속도에 불확실성이 생겼다”며 효성중공업 목표주가를 420만원에서 400만원으로 내렸다.
환율도 악재다. 대신증권은 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HD현대일렉트릭의 3분기 원화 환산 이익이 시장 예상을 밑돌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목표주가도 115만원에서 102만원으로 낮췄다. 하나증권 역시 목표주가를 144만원에서 115만원으로 하향 조정했다.
◇“납기 2~3년…공급 부족 여전”
전력기기 업황이 정점을 지났다는 ‘피크아웃’ 논쟁도 주가에 부담을 주고 있다. 최근 인도 업체들이 대규모 증설에 나선 데다 국내 빅3도 미국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어서다. 공급 증가로 전력기기 가격과 수익성이 하락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공급 과잉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JP모간은 서방 전력기기 시장의 높은 진입장벽을 고려하면 인도 업체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은 2028~2029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주요 업체의 증설 속도 역시 수요 증가세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분석이다.
수익성도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하나증권은 효성중공업의 3분기 영업이익률이 16.3%로 분기 기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으로 추정했다. 매출 인식이 일부 지연되더라도 고수익 제품 비중 확대에 따른 수익성 개선은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다. JP모간은 데이터센터 건설이 일부 지연되더라도 전체 수주잔액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봤다. 국내 전력기기 업체 수주잔액의 80~90%가 전력회사와 전력망 관련 발주 물량이라는 점에서다.
최근 주가 조정으로 국내 전력기기주의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 수준) 부담도 낮아졌다. 지난 8일 기준 효성중공업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21배, HD현대일렉트릭은 19배로 글로벌 동종업체 평균(28배)을 밑돌았다. 반면 LS일렉트릭은 PER이 39배를 넘어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JP모간은 “한국 전력기기주에 대한 기관투자가의 관심이 회복되고 있다”며 “일부 헤지펀드는 PER이 10배대 중후반으로 내려오면 저가 매수에 나설 의향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