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그리스 신화 기반의 '빨강 자서전' 접근 쉽고, '녹스'는 가장 실험적
“외계에서 왔거나 고대에서 온 사람 같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샘 앤더슨은 캐나다 시인 앤 카슨(76)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와 소설, 비평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 세계는 기존의 문학적 분류로는 담아내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 카슨이 지난 8일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고대 그리스 신화를 현대의 사랑 이야기로 바꾸고, 시에 문학비평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사진과 편지를 엮어 한 권의 책을 펴내기도 한다. 낯설고 실험적인 작품 세계지만 그 중심에는 사랑과 상실, 욕망과 슬픔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이 자리한다. 카슨을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어떤 책부터 읽는 게 좋을까. 대표작 다섯 권을 소개한다.

(1) 빨강의 자서전(1998)

카슨의 대표작이자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운문소설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에게 죽임당하는 붉은 날개 달린 괴물 게리온을 현대의 소년으로 되살렸다. 게리온은 자신을 죽일 운명이었던 헤라클레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상처받고 버림받는다. 괴물의 시선으로 사랑과 성장, 소외와 정체성의 문제를 풀어낸다. 시의 언어로 쓰였지만 소설처럼 인물과 사건을 따라갈 수 있어 입문작으로 적합하다.

(2)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1995)

카슨 특유의 시적 언어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시집이 좋다. 특히 장시 ‘유리 에세이’는 연인과 헤어진 화자가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동시에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의 삶과 작품을 탐색하는 이야기다. 화자는 브론테의 문학에서 자신의 아픔을 이해할 실마리를 찾는다. 실연의 고통과 문학비평, 개인적인 기억이 한 편의 시 안에서 뒤섞인다. 감정을 직접 토로하기보다 다른 작가의 문학을 거울 삼아 자기 내면을 비춰보는 카슨의 독특한 작법이 드러난다.

(3) 에로스, 달콤씁쓸한(1986)

카슨의 사상적 뿌리를 이해하고 싶다면 읽어야 할 책이다. 첫 문학비평서로,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가 사랑을 표현한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감정에 주목한다. 사랑은 왜 기쁨인 동시에 고통일까. 카슨은 사포와 플라톤 등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며 사랑의 본질을 ‘결핍’에서 찾는다. 원하는 대상과 그것을 소유할 수 없는 현실 사이의 거리가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다른 작품들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랑과 갈망의 문제를 이해할 열쇠가 된다.

(4) 남편의 아름다움(2001)

아름다움은 진실과 같은 것일까. 이 작품은 거짓말을 일삼는 남편에게 끊임없이 끌리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모순을 파고든다. 남편의 외도와 거짓말로 결혼생활이 무너져가지만, 화자는 그의 아름다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카슨은 이 관계를 29편의 ‘탱고’로 구성했다. 춤을 추듯 서로에게 다가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시적 리듬 속에 펼쳐진다. 사랑의 파괴적인 속성을 탐구한 작품으로, 카슨은 이 책으로 여성 최초로 영국의 권위 있는 T.S. 엘리엇 상을 받았다.

(5) 녹스(2010)

카슨의 형식 실험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세상을 떠난 오빠 마이클을 애도하기 위해 만들었다. 일반적인 시집과 달리 상자 안에 아코디언처럼 길게 펼쳐지는 종이가 들어 있다. 그 위에 사진과 편지, 손글씨, 그림, 고대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시를 번역하고 해석한 글 등이 배치돼 있다. 독자는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따라가며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더듬는다. 책이라는 물리적 형식 자체를 애도의 수단으로 바꾼 작품이다.

이 시집을 한국어로 옮긴 윤경희 번역가는 “카슨의 글쓰기에는 노래, 문자, 언어, 글쓰기에 대한 인간의 오랜 사랑이 압축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카슨은 쾌락과 고통, 열정적인 사랑과 수치심, 죽은 자에 대한 비애까지 인간의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며 “그의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감정의 해방과 고양을 경험한다”고 했다.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은 <녹스>에 대해 이런 찬사를 남겼다. “밤을 들여다보는 책이 왜 이렇게 눈부신 걸까? 사무치게 진실한 것은 어둠을 꿰뚫는 빛이 되고 마는 것일까?”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