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룩 백'의 한 장면. 메가박스중앙 제공
고레에다 히로카즈 '룩 백'의 한 장면. 메가박스중앙 제공
“룩 백(Look Back).” ‘뒤돌아보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거나, 더 나아가 지나간 일을 돌아보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체인소 맨>으로 잘 알려진 일본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세계에서 ‘Back’은 물리적 시선이나 지나온 과거만 가리키지는 않는다. ‘Look (at someone’s) back’.

그러니까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의미가 통할 수 있다. 등을 바라본다는 건 누군가를 동경하고, 그를 좇으려 애쓴다는 뜻이기도 하다.

2021년 일본 점프 코믹스에 단편으로 내놓은 만화 <룩 백>에서 후지모토는 이 두 가지 시선을 겹쳐 놓았다. 143쪽의 짧은 만화가 남긴 여운은 길었다. 재능 있다고 믿는 후지노와 그를 ‘센세(선생님)’라 부르면서도 더 압도적인 그림 실력을 지닌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친구 쿄모토의 우정과 상실을 담은 이야기는 공개 직후 일본 만화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즈음 일본 영화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눈에 <룩 백>이 들어왔다.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참석한 그는 지난 7일 영화의전당을 찾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읽었어요. 집에서 밤늦게 읽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창작자들이 짊어진 업(業)에 대한 이야기라 느꼈고, 그걸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만화 '룩 백' 표지. 학산문화사 제공
만화 '룩 백' 표지. 학산문화사 제공
고레에다가 <룩 백>을 가장 먼저 스크린으로 옮긴 것은 아니다. 일본 명작 만화라면 으레 그렇듯,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이 58분짜리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단편’ ‘애니메이션’이라는 흥행에 불리한 조건에도 2024년 일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고, 국내에서도 메가박스 단독상영으로 32만 명을 끌어모으는 이례적인 흥행을 거뒀다.

고레에다가 선보인 ‘룩백’은 이 서사의 마침표라 할만하다. 143쪽짜리 만화는 58분의 애니메이션이 됐다가 이번에 러닝타임 100분의 실사영화가 됐다. 지난달 ‘제83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과 겨뤘고, 지난 6일 개막한 BIFF에선 갈라프레젠테이션 부문 초청작으로 한국 관객과 처음 만났다.

서사는 만화 그대로다. 원작의 스토리텔링이 흠잡을 데 없어서다. 학교신문 ‘네 컷 만화’를 전담하는 초등학생 후지노(데구치 나츠키·아역 나나세 후리)는 ‘등교 거부학생’ 쿄모토(마키타 아쥬·아역 오카다 로카)의 존재를 알게 되며 성취의 기쁨과 쓰디쓴 열패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만화로는 1등’이라 여겼던 후지노의 세상이 쿄모토의 압도적인 그림으로 인해 깨졌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룩 백'의 한 장면. 메가박스중앙 제공
고레에다 히로카즈 '룩 백'의 한 장면. 메가박스중앙 제공
질투나 싸움 같은 것은 없다. 두 사람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며 ‘후지노 쿄’라는 필명으로 함께 만화를 그린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뛰어난 후지노는 캐릭터 표현과 스토리라인을, 믿기지 않는 작화 실력을 가진 쿄모토는 배경을 그려내며 성공을 거둔다. 둘은 끊임없이 서로의 등을 보며 그림을 그린다. 쿄모토를 만나 ‘한 때의 취미’가 됐을 만화를 직업으로 삼기로 한 후지노는 쿄모토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후지노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온 쿄모토는 언젠가 후지노의 이야기를 빛내줄 그림을 그려내겠다고 결심할 만큼 성장한다.

둘의 우정은 쿄모토가 ‘후지노 쿄’ 콤비에서 하차해 그림을 배우겠다며 미대에 진학한 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며 멈춘다. 후지노는 잘 나가는 만화 연재를 포기할만큼 슬픔에 잠긴다. 쿄모토와 이별하게 된 이유가 훌륭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무언의 압박을 줬던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목 ‘Look back’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쿄모토의 비어있는 집에서 후지노가 과거를 돌아본 끝에 발견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동경해 앞으로 나가려 노력하던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쿄모토는 후지노를 보며 세상 밖으로 나왔고, 후지노는 쿄모토를 보며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후지노는 다시 펜을 들고 만화를 그린다.
배우 나나세 후리(왼쪽부터)와 데구치 나즈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마키타 아쥬, 오카다 로카가 7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비프힐에서 열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룩백’ 갈라 프레젠테이션 기자회견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스1
배우 나나세 후리(왼쪽부터)와 데구치 나즈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마키타 아쥬, 오카다 로카가 7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비프힐에서 열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룩백’ 갈라 프레젠테이션 기자회견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스1
100분짜리로 늘어난 영화는 장황하지 않다. 단편만화가 장편영화로 됐지만, 군더더기가 없을 만큼 장면이 촘촘하고 아름답다. 후지노와 쿄모토가 왜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됐는지를 영화적 표현으로 납득시키기 때문이다.

말없이 펜을 움직이는 손, 종이에 펜을 쓱쓱 긋는 소리, 쌓여가는 원고와 창밖으로 바뀌는 풍경 등 고레에다의 특유의 절제된 연출과 밀도 높은 촬영이 만화의 정서와 맞물린다. 어린 후지노가 쿄모토에게 동경한다는 말을 듣고선 벅차오르는 감정을 안고 빗길을 내달리는 장면에선 해방감과 희열이 스크린 밖으로 번진다.

디지털이 아닌 35㎜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선택도 절묘하다. 그만큼 만화 같은 영상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필름으로 찍으면 연기자들은 더욱 긴장하게 되겠지만, 그런 긴장감이 모일 때 현장에서 피어나는 자장(磁場)이 있다고 믿는다”라며 “그게 작품에 담기고, 관객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종이 위에 펜촉을 대고 잉크로 선을 긋는 만화가의 작업처럼 필름 촬영은 쉽게 되돌릴 수 없는 ‘아날로그적’ 창작 행위다. 어쩌면 <룩 백>을 필름으로 촬영하는 자체가 작품에 대한 고레에다식의 오마주는 아니었을까.

부산=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