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인수합병(M&A) 거래의 절반 이상이 대기업의 사업부 분리 매각(카브아웃)과 자회사 매각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대기업들이 비주력 사업을 정리하며 선제적으로 포트폴리오 조정에 나선 영향이다. ‘다다익선’을 추구하며 신사업을 늘리는 데 주력하던 대기업의 경영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7일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내 M&A 거래 가운데 사업 매각 비중은 거래금액 기준 61%를 차지했다. 사업 매각은 지주사의 자회사 매각과 카브아웃 등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올해 들어 쏠림 현상은 더 뚜렷해졌다. 지난 8월까지 사업 매각 비중은 거래금액 기준 74%에 달했다. 거래 건수 기준으로도 절반 이상(52%)이 사업 매각이었다.
조정민 BCG 파트너는 “과거엔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기업이 일시적으로 자산 매각에 나섰다면 최근에는 사업 재편을 위해 상시로 M&A를 고려하는 기업이 많다”고 말했다. 정부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과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 책임 원칙) 강화 등도 사업 매각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힌다. 기업이 자본 효율성이 낮은 비핵심 사업 대신 수익성과 성장성이 높은 분야에 투자를 확대하면서다.
대기업 사업 재편의 핵심 파트너로 사모펀드(PEF)가 부상했다. BCG에 따르면 전체 사업 매각 거래 중 PEF가 참여한 비중은 2012~2016년 14%에서 2021~2025년 21%로 7%포인트 높아졌다. 지난해 PEF가 참여한 국내 M&A 거래의 64%가 사업 매각에서 발생했다.
SK, 사업재편 가장 활발…반도체 호황에도 매각 속도 비핵심 매각후 성장사업 재투자
사업구조를 개편해 몸집을 가볍게 한 대기업이 부쩍 늘었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비주력 자회사나 사업부를 과감히 떼어내고 핵심 사업에 실탄을 집중하는 선제적이고 상시적인 포트폴리오 재조정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위기 상황을 맞았을 때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자산을 매각하고 유동성 확보에 나선 것과는 양상이 다르다.
7일 업계에 따르면 사업 재편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SK그룹이다. 2023년 3조원 규모의 SK쉴더스 매각을 시작으로 SK렌터카, SK스페셜티, SK피유코어(현 피유코어), 보령LNG터미널 등을 잇달아 매각했다. 올해 역대급 반도체 호황으로 대규모 자금이 그룹에 유입되고 있지만 M&A를 멈추지 않고 있다. SK그룹은 글로벌 3위 반도체 웨이퍼 제조사인 SK실트론 지분 70.6%를 2조3000억원에 두산그룹에 넘기기로 했다.
현대자동차와 LG, 롯데 등도 비슷한 모습이다. 현대모비스는 미래 모빌리티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범퍼·램프사업부 매각을 진행하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수처리 필터 사업부와 에스테틱 사업부를 각각 글랜우드프라이빗에쿼티, VIG파트너스에 팔았다. 롯데그룹은 국내 1위 렌터카 업체인 롯데렌탈을 텍사스퍼시픽그룹(TPG)에 매각하기로 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1~8월)까지 사업 매각이 전체 M&A 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년 50%를 웃돌았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사업 매각은 부실 사업을 정리하거나 단기 유동성을 확보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며 “비핵심 사업을 매각한 뒤 핵심 성장 사업에 재투자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포트폴리오 전략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 내 특정 사업부를 분할해 매각하는 카브아웃은 고난도 M&A로 평가받는다. 독립 법인으로 운영된 적이 없는 사업부에 새로운 운영 시스템을 도입하고 인사, 재무 등 기능도 새로 붙여야 해서다. 대기업의 사업 매각 시도가 활발하지만 사전 준비 작업은 부족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IB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서는 매각 전부터 6개월~1년가량 분리 준비 작업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라며 “국내에서는 이런 과정이 부족해 세부 협상 단계에서 딜이 무산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말했다. 효성화학은 앞서 2024년 특수가스 사업 매각에 나섰지만, 실적 전망치에 대한 인수 측과의 이견으로 협상이 무산됐다.
기업이 내놓는 매물 중 일부만 비싼 가격에 팔려나간다는 점도 주목된다. BCG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M&A 평균 거래금액은 1억2900만달러로 중앙값(1400만달러)의 9.2배다. 이는 글로벌 평균 격차(4.7배)의 두 배에 가깝다. 조정민 BCG 파트너는 “기술 트렌드 변화가 빨라지면서 검증된 자산에만 투자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특히 거래 구조와 수익성이 명확한 대기업 자산으로만 돈이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