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과일의 천국 태국  [우] 먹기 좋게 손질해주는 과일 노점이 많다 / 사진. ©신예희
[좌] 과일의 천국 태국 [우] 먹기 좋게 손질해주는 과일 노점이 많다 / 사진. ©신예희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진 병이 있다. ‘차원 달라 병’. 신종 유행병인가 싶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니다. 외국을 여행하는 중에 그 나라 음식의 참맛을 느끼고 나면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그 맛 타령을 하게 된다는 농담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말도 마, 터키 요거트 맛은 차원이 달라.’ ‘프랑스 현지에서 먹는 크루아상 버터 향기는 차원이 달라.’ 한국을 찾은 외국 여행자들도 귀국해선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며 비슷한 소릴 할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 차원 달라 병의 원조는 뭐니 뭐니 해도 이거다. ‘동남아시아 과일은 차원이 달라.’ 오만가지 수입 과일을 국내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역시 현지에서 먹는 맛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 나 역시 이 소리를 하도 달고 다닌 탓에 주위 사람들에게 핀잔도 꽤 들었다. 하지만 정말 다르니 어쩔 수 없다. 용서하시라.

26년 전, 처음으로 방콕을 여행할 때 먹었던 바나나가 시작이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세세한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첫입에 화들짝 놀랐던 감정만큼은 생생하다. 나의 첫 혼자 여행이었는데, 잔뜩 긴장해선 되도록 익숙한 것만 찾아다녔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에서 묵으며 한국인 여행자들과만 대화했고, 낯선 태국 음식은 엄두가 나지 않아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만 갔다. 과일 역시 익숙한 것 아니면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나마 바나나라서 사 먹은 거다. 그런데 이럴 수가, 맛이 너무 달랐다. 내가 알던 그 바나나 맞아? 오늘의 내가 처음 보는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사람이 된 건, 이런 크고 작은 충격이 오랫동안 하나둘 쌓인 결과일 것이다.
내 마음을 빼앗은 남와 바나나 / 사진. ©신예희
내 마음을 빼앗은 남와 바나나 / 사진. ©신예희
단면이 아주 쫀쫀하고 주황빛이 감돈다 / 사진. ©신예희
단면이 아주 쫀쫀하고 주황빛이 감돈다 / 사진. ©신예희
그 바나나의 정체는 뭐였을까? 요즘 같으면 휴대폰으로 검색하거나 AI에게 물어보면 금방 답이 나오겠지만, 당시엔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도 널리 보급되지 않은 터라 오랫동안 미스터리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나름의 경험을 쌓고 공부도 한 결과, 남와(กล้วยน้ำว้า) 품종일 거란 결론을 내렸다. 남와는 고대부터 내려온 태국 고유의 품종으로 전국 어디서나 생산되는 인기 있는 바나나다. 짧고 뚱뚱한 게 참 귀엽다. 과육 가운데 부분은 살짝 주홍빛이 감돌고, 우리가 아는 바나나보다 조금 더 새콤하다. 그저 신맛만 나는 게 아니라 레몬처럼 향그럽고 바닐라 풍미도 섞였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질감이 끝내주는데, 찰지고 쫀득하고 크리미하다.
[좌] 누구나 좋아하는 바나나 구이와 튀김  [우] 코코넛 밀크에 담가서 익힌 바나나 디저트 / 사진. ©신예희
[좌] 누구나 좋아하는 바나나 구이와 튀김 [우] 코코넛 밀크에 담가서 익힌 바나나 디저트 / 사진. ©신예희
남와는 태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바나나 품종이다. 심지어 아기 이유식으로도 남와를 먹인다는데, 그럴만하다. 아기야말로 가장 솔직한 소비자니까. 맛이 별로였다면 뱉었을 거다. 길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바나나 꼬치구이와 튀김 역시 남와 품종을 쓴다. 열을 가하면 특유의 산미가 좀 더 선명해진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남와라는 이름을 외워두었다가 확인하고 구매하길 권한다. 이왕이면 맛있는 걸 먹어야 하지 않은가.

태국 내에서 유통되는 바나나 품종만 해도 30여 가지가 되니 자칫하면 다른 걸 사기 쉽다. 그러고 보면 우리도 국산 과일의 품종을 꼼꼼히 따지곤 한다. 캠벨과 샤인머스캣, 거봉 포도의 맛이 천지 차이고, 홍로와 부사, 감홍 사과 역시 달라도 너무 다르다. 수입 과일은 아직 선택지가 부족해서 고르고 따지지 못할 뿐.
"한국서 먹던 맛이 아닌데?"…태국 여행서 깜짝 놀란 이유 [신예희의 나홀로 한입여행]
[좌] 아직 자그마한 잭프루트 열매  [우] 보랏빛의 바나나 꽃 / 사진. ©신예희
[좌] 아직 자그마한 잭프루트 열매 [우] 보랏빛의 바나나 꽃 / 사진. ©신예희
요런 작은 깨달음 덕분에 여행지에서 과일을 사는 즐거움이 한결 커졌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망고와 파인애플, 용과 등의 과일일지라도 되도록 다양한 품종에 도전해볼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어디서 구매하는 게 좋을까? 전통시장은 흥겨운 분위기와 저렴한 가격이 매력이지만 조금씩 다양하게 사기는 좀 눈치 보인다. 그보다는 대형마트 식품 매장 쪽이 훨씬 편하다. 채소든 과일이든 뭐든 품종명과 가격이 또렷이 쓰여 있으니 골고루 한 알씩 사고 사진도 찍어 기록하기 좋다.

한번은 여섯 종류의 망고를 사다가 숙소 식탁에 늘어놓고 번갈아 먹어보았다. 단맛 강한 순, 신맛 강한 순으로 정렬도 해보고, 딱딱한 것과 쫀득한 것으로도 나누어 메모도 했다. 혼자서 조금 긴 여행을 할 땐 요런 놀이를 하면 시간이 잘 간다. 어떤 망고에선 생강과 비슷한 알싸한 맛이 나고, 어떤 것에선 유난히 진한 코코넛 풍미가 감돈다.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니 생소한 식재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는 효과도 있다.
전통시장을 돌아보면 제철 과일 공부가 된다 / 사진. ©신예희
전통시장을 돌아보면 제철 과일 공부가 된다 / 사진. ©신예희
과일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당연하지만 제철에 먹는 것이겠다. 일 년 내내 덥기만 할 것 같은 태국에도 엄연히 계절이 있고, 각각 뚜렷한 차이가 있다. 보통 11월부터 2월까지는 건기로 친다. 꽤 선선하고 습도도 낮아, 겨울 느낌이 난다. 3월에서 5월 중순 사이에는 여전히 건조하지만, 몹시 뜨거운 혹서기라 여행하기에 좋지 않다. 그 시기가 끝난 후 10월 말까지는 거의 매일 스콜이 시원하게 쏟아진다. 우기다. 계절별로 가장 맛있는 과일도 다르다. 망고와 두리안, 리치는 3~5월, 망고스틴과 람부탄은 6~8월, 파인애플과 잭프루트, 로즈애플은 11~2월을 제철로 친다. 바나나와 코코넛, 파파야는 딱히 철을 가리지 않고 일 년 내내 두루 맛있다.
[좌] 제철의 촘푸는 최고의 맛이다  [우] 고춧가루와 소금을 살짝 더하면 더 달게 느껴진다 / 사진. ©신예희
[좌] 제철의 촘푸는 최고의 맛이다 [우] 고춧가루와 소금을 살짝 더하면 더 달게 느껴진다 / 사진. ©신예희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겨울 과일인 로즈애플로, 촘푸(ชมพู่)라고 한다. 서양 배와 비슷한 종 모양이고 겉은 반들반들한 진한 빨간색이거나 연한 초록색, 속살은 밝은 노란색이다. 아삭아삭하고 물기가 많아 무척 상쾌하다. 로즈애플은 꼭 제철에 먹어야 하는데, 단맛도 신맛도 강하지 않고 은은해 철 지난 후 먹으면 맹탕이기 십상이다. 한여름에 태국을 여행하며 로즈애플을 처음 맛본 사람이라면 생긴 것만 먹음직스럽지 맛은 별로라고 생각할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아닌데, 겨울에 드셔봐야 하는데.
마트 식품 코너의 망고 찹쌀밥 / 사진. ©신예희
마트 식품 코너의 망고 찹쌀밥 / 사진. ©신예희
여기까진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맛있고 독특한 태국의 과일 이야기였지만, 지금부터 이야기할 음식에 대해선 왠지 호불호가 크게 갈릴 거라는 강력한 예감이 든다. 좋아하는 사람은 말만 들어도 군침을 삼키는 데 비해 싫어하는 사람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사래 치는 음식. 바로 망고 찹쌀밥이다. 나처럼 ‘태국 과일 차원 달라 병’ 중증 환자인 친구마저도 이것만은 먹기 싫다는 소리를 해서 놀랐다. 망고와 찹쌀밥이 한 단어로 엮이다니, 애초에 이름부터 글러 먹었다나. 밥이란 건 간간한 반찬과 함께 먹어야 하는 건데 달콤하게 먹는 게 말이 되냐는 거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쌀로 만든 디저트는 이미 여러 문화권에 널리 퍼져 있다. 10세기경부터 먹기 시작했다는 튀르키예의 라이스 푸딩 슈틀라치(Sütlaç)도 그렇고, 쌀알이 오독오독 씹히는 게 매력인 이탈리아의 젤라토 알 리조(Gelato al riso)도 오랜 전통의 클래식이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내가 무척 사랑하는 우리 전통 음식이 있다. 찹쌀에 꿀이나 설탕을 듬뿍 넣고 간장으로 살짝 간을 한 다음, 밤이나 잣 등의 견과류와 달콤새콤한 대추를 한 줌 넣어 참기름을 휘휘 둘러 익힌 쫀득하고 달콤하고 향기로운 약식 말이다. 망고 찹쌀밥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질 때 약식의 맛을 떠올리면 거리감이 한층 줄어들 것이다.
마트 식품 코너의 망고 찹쌀밥 / 사진. ©신예희
마트 식품 코너의 망고 찹쌀밥 / 사진. ©신예희
망고 찹쌀밥의 태국어 명칭은 카우니여우마무앙(ข้าวเหนียวมะม่วง)이다. 카우니여우는 찹쌀, 마무앙은 망고다. 아무래도 조금 어려운 이름이어서인지, 영어인 망고 스티키라이스(mango sticky rice)로도 으레 통한다. 최초의 기록은 1700년대 후반 아유타야 왕조 시대로, 찹쌀과 망고의 수확량이 두루 풍부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음식으로 알려졌다.

태국뿐 아니라 캄보디아와 라오스,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금세 전파되었다니, 이미 수백 년에 걸쳐 맛이 입증된 셈이다. 슈퍼마켓에선 망고 찹쌀밥 맛의 초콜렛과 과자, 요거트, 아이스크림 등을 흔히 살 수 있고, 수많은 디저트 카페에선 망고 찹쌀밥 맛의 케이크와 빙수가 인기 메뉴로 자리 잡았다(2015년경부터 한국식 빙수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บิงซู라고 쓰고 빙수라고 읽는다).
장사 준비 완료 / 사진. ©신예희
장사 준비 완료 / 사진. ©신예희
인기 있는 가게는 으레 망고도 함께 팔고 있다 / 사진. ©신예희
인기 있는 가게는 으레 망고도 함께 팔고 있다 / 사진. ©신예희
노점과 야시장, 푸드코트 등 음식을 파는 곳이라면 십중팔구 망고 찹쌀밥도 있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볼이나 냄비에 윤기 흐르는 찰밥을 담아놓고, 샛노랗게 익은 큼직한 망고를 잔뜩 쌓아두었다면 제대로 찾은 거다. 어디서 먹든 다 맛있지만, 나는 이왕이면 망고 찹쌀밥으로 이름난 가게에 가보길 권한다. 우리나라 지역마다 큰 사랑을 받는 유서 깊은 유명 떡집이 있듯, 방콕에도 망고 찹쌀밥으로 손꼽히는 곳이 많다. 찹쌀과 망고의 맛이란 게 거기서 거기일 것 같지만, 실제론 꽤 차이 난다. 손님이 많은 가게일수록 그만큼 더 좋은 품질의 과일을 안정적으로 대량 구입할 확률이 높을 거고, 밥도 짓는 족족 금세 팔려나가 묵은내가 나지 않을 것이다.

태국의 찹쌀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길쭉하고 가느다랗다. 밤새 불렸다가 찹쌀밥을 지어서 잠시 식혀두고, 코코넛 크림에 설탕을 넉넉히, 소금은 약간만 섞어서 살살 데워 가며 잘 녹인 걸 밥에다 골고루 부어서 잘 섞으면 밥 완성. 잘 익은 망고를 한입 크기로 썰어서 찹쌀밥과 함께 담고 소스를 곁들인다. 이 소스는 조금 전의 것과는 다른 건데, 코코넛 크림에 소금과 쌀가루를 조금씩 넣어가며 저으면서 데워서 걸쭉하게 만든 거라 짭짤하다. 이 짠 기가 망고의 단맛을 한층 더 올려주는 역할을 한다. 코코넛 크림은 잘 익은 코코넛의 하얀 속살을 득득 갈아서 즙을 꾹 짜낸 것인데, 만드는 방법은 코코넛 밀크와 같지만 지방 함량이 1.5배 가량 높고 농도도 진하다. 음식 이름은 망고 찹쌀밥이지만 실은 코코넛 크림이야말로 맛의 핵심이다. 이 진하고 묵직한 향기가 빠진 망고 찹쌀밥은, 말하자면 간장과 참기름이 들어가지 않은 약식과도 같다.
짭짤한 코코넛 소스와 튀긴 녹두알은 필수다 / 사진. ©신예희
짭짤한 코코넛 소스와 튀긴 녹두알은 필수다 / 사진. ©신예희
더불어 절대 빼놓으면 안 되는 게 하나 더 있으니, 튀긴 녹두알 투아통톳(ถั่วทองทอด)이다. 껍질 벗긴 녹두 알을 물에 충분히 불렸다가 물기를 완전히 닦아낸 후 기름 솥에 넣어 황금색이 나도록 튀긴 건데, 망고 찹쌀밥 맨 위에 후드득 뿌려서 먹는다. 많이 뿌릴 필요도 없고, 반 숟가락 정도. 그 정도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니겠냐고? 큰일 날 소리다. 달콤새콤하고 부드러운 망고에 쫀득하고 찰진 찹쌀밥만 먹는 것과, 이 오독오독하고 고소한 튀긴 녹두 알까지 한 번에 씹는 것은 천지 차이다. 튀김의 고소한 기름 맛이 전체적인 풍미를 올려주는 건 기본이다. 또한 녹두는 꽤 단단한 곡물이라, 불렸다가 튀겼음에도 여전히 힘이 좋다. 씹는 맛이 그렇게 크니 망고 찹쌀밥 한 접시를 끝까지 다 먹을 때까지 물리지 않게 해준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과일이 맛있어봤자 얼마나 맛있다고, 오버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진지하게 썼다. 심지어 망고 찹쌀밥만을 위해서 방콕행 항공권을 결제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한다. 하긴, 여행에 무슨 대단한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맛있는 음식 하나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