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경쟁하기에 약해 보여"…28년 CEO 차석용을 만든 말들 [직장인 토요책방]
"너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기에 약해 보여."

차석용 전 휴젤 회장(73)이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동기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서른두 살에 들어간 첫 직장은 P&G 미국 본사였습니다. 1주일간의 신입사원 교육이 끝나 갈 무렵, 동료는 그를 냉정하게 평가했습니다. 영어와 미국식 소통 방식에도 서툰 데다, 그날 발표도 충분히 준비된 것 같지 않다는 얘기였죠.

미국에서 학·석사를 마쳐 스스로 미국인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 온 그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부끄러워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도 돌아가지 못했죠. 하지만 그는 평가를 부정하는 대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나는 타고난 것이 부족하니, 노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말자."

이후 건물 문이 열리는 새벽 6시에 출근해 문이 닫히는 밤 10시까지 회사에 머물렀습니다. "배우고, 혼나고, 고민하고, 돌아본 뒤 다시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최근 출간된 <하심>은 차 전 회장이 40년 넘는 경영 인생을 돌아본 책입니다. 쌍용제지와 한국 P&G, 해태제과를 거쳐 LG생활건강을 18년간 이끈 그는 재계에서 보기 드문 장수 전문경영인으로 꼽힙니다.

LG생활건강에서는 적극적인 인수합병(M&A)으로 사업을 넓히며 재임 기간 매출을 9배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책이 붙잡는 것은 이런 숫자보다, 그 숫자에 이르는 길목마다 스스로를 낮추고 다시 들여다봐야 했던 순간들입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뜻의 제목처럼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 그 태도는 현장에서 사람을 보는 눈으로 이어졌습니다. P&G 시절 뉴욕 스태튼아일랜드 공장에서의 일입니다. 당시 본사는 인건비와 세금, 운영비 부담을 이유로 오래된 공장을 옮기려 했지만, 노조의 거센 반대로 수년째 제자리였습니다.

매일 생산라인을 돌던 그는 세제에 향을 뿌리는 스프레이건 다섯 개 중 하나가 심하게 구부러져 제대로 분사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라인도 마찬가지였죠. 알고 보니 직원들이 가장 비싼 원재료 중 하나인 향수를 일부러 덜 넣고 있었습니다. 원가를 낮춰 '이 공장은 생각만큼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려던 겁니다.

위에서 내려다봤다면 단순한 품질 문제로 보였을 일이, 눈높이를 낮추자 공장 폐쇄를 막으려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으로 보였습니다. 차 전 회장은 이때 "대안 없이 사람을 몰아붙이면, 사람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을 방법부터 찾는다"는 깨달음을 새겼다고 합니다.

마음을 낮추는 일은 남을 이해할 때만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최고경영자(CEO)가 된 뒤에는 자기 확신을 의심하는 일이 더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LG생활건강이 코카콜라의 한국 보틀링 사업 인수를 추진할 때였습니다. 대상 회사는 3~4년째 적자였고 강성 노조도 세 곳이나 있었습니다. 최종 입찰을 이틀 앞두고는 경쟁자를 제치려면 최소 400억원을 더 써야 한다는 연락까지 왔습니다.

차 전 회장은 흔들렸습니다. 사업에 대한 믿음은 여전했지만, 그 확신이 집착이 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결국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회장님, 이제 제 본업에 충실하겠습니다." 사실상 인수를 접겠다는 뜻이었죠.

구 회장은 별말이 없다가, 이튿날 점심을 함께하자며 그를 차에 태웠습니다. 마포대교 끝에서 기사를 내보낸 뒤 물었습니다. "어제 이야기 이후 달라진 거 있어?" "없습니다."

구 회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차 사장, 이거 한번 멋지게 잘해 볼 수 있어? 400억이 지금은 엄청 큰돈 같지? 그런데 나중에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결국 중요한 건 돈이 아니야. 정말 이 사업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느냐, 그리고 그걸 해내겠다는 열정이 있느냐 하는 거지."

차 전 회장은 점심은 못 먹겠다며 차에서 내려, 곧장 코카콜라 측이 머물던 하얏트호텔로 향했습니다. 협상은 밤 10시를 넘겨 이어졌고, 다음 날 최종 입찰서를 낸 LG생활건강은 코카콜라 보틀링 코리아를 품었습니다. 스스로의 확신을 끝까지 의심했기에, 다시 확신이 섰을 때 망설임 없이 움직일 수 있었던 셈입니다.

책 후반에는 2005~2020년 그가 임직원들과 나눈 'CEO 메시지' 16편도 실렸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것, 사실과 의견을 구분할 것, 직급이나 영향력보다 사실과 논리에 권위를 둘 것, 나쁜 소식일수록 빨리 알릴 것. 현장에서 다듬어진 이 원칙들은 모두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하심의 다른 이름처럼 읽힙니다.

젊은 시절 그는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성장이라 믿었다고 합니다. 40년 넘게 현장을 지나와 돌아보니 기억에 남은 건 성과만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함을 지적해 준 동료, 현장에서 만난 직원들, 중요한 순간 판단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