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세계 최정상 무대에서 단단한 내공을 뽐내며 활약하고 있는 무용수 나가히사 메이(26)와 전민철(22)을 최근 만났다. 8월 말 한국 갈라 무대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낭만 발레의 정수인 <지젤> 2막 파드되(2인무)와 네오클래식의 거장 조지 발란신의 <주얼스> 중 ‘다이아몬드’ 파드되를 췄다. 공연은 막을 내렸지만, 무대 위에서 주고받았던 이야기는 짙은 여운을 남겼다.
지난달 서울 이태원 몬드리안 호텔에서 만난 마린스키발레단의 나가히사 메이(왼쪽)와 전민철. 문경덕 기자
지난달 서울 이태원 몬드리안 호텔에서 만난 마린스키발레단의 나가히사 메이(왼쪽)와 전민철. 문경덕 기자
올해만 두 번째 한국 무대를 찾은 나가히사 메이(26)는 한국 관객 특유의 열정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일본 관객분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얌전하게 작품을 감상한다면 한국 관객분들은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을 열렬히 응원하고 무대 위 동작 하나하나에 뜨겁게 반응해준다”고 전했다. 바쁜 연습 일정 중에는 전민철과 함께 명동을 찾아 디저트, 만두와 칼국수를 맛보는 등 소소한 일상을 즐기기도 했다.

전민철(22)에게도 이번 무대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앞서 선보인 ‘한여름 밤의 발레 축제’에서 조지 발란신의 <주얼스> 중 ‘다이아몬드’를 처음 무대에 올렸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영상을 보며 꿈꿔오던 작품이지만, 막상 무대에 올리려면 섬세하고 치밀한 파트너링이 필요한 작품이었다. 메이 나가히사와 함께였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나가히사는 이 작품을 마린스키의 또 다른 간판스타인 김기민 수석무용수와 도쿄의 한 갈라 무대에서 함께 춘 경험이 있다. 같은 작품이라도 파트너가 바뀌면 춤의 표현도 달라지기 마련.
8월 말, 서울에서 열렸던 '한 여름 밤의 발레 축제'에서 조지 발란신의 '주얼스' 중 '다이아몬드' 2인무를 선보이고 있는 나가히사 메이(앞)와 전민철. ⓒYOON6PHOTO
8월 말, 서울에서 열렸던 '한 여름 밤의 발레 축제'에서 조지 발란신의 '주얼스' 중 '다이아몬드' 2인무를 선보이고 있는 나가히사 메이(앞)와 전민철. ⓒYOON6PHOTO
“김기민과 ‘다이아몬드’를 췄을 때는 상대적으로 그가 경험이 더 많아 제가 배우는 점이 많았어요. 전민철과 춤을 출 때는 제가 가진 정보를 나눠줄 수 있어 기뻤습니다.”

나가히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춤추는 스타일과 에너지가 완전히 다르다. 그런 만큼 새롭게 발견하는 부분도 많았다고. 어떤 사람과 춤추는 게 더 편한가라는 질문에 나가히사는 잠시 망설이다 미소를 지었다. “예술에 정답이 없듯 어느 한쪽을 꼽기보다 각 파트너가 가진 독창성 그 자체가 발레의 매력이에요.” 파트너를 비교하는 대신 상대가 가진 고유의 개성을 발견하는 것. 두 사람이 함께 춤추는 방식도 그와 닮아 있었다.

서로에게서 배우는 가장 가까운 동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메이 나가히사와 전민철은 가장 가까운 동료로 지낸다. 지난 시즌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호흡을 맞출 예정이었지만 나가히사의 부상으로 무산됐다. 이번 한국 무대는 두 사람이 미뤄두었던 만남을 다시 성사시킨 자리이기도 했다.
8월 말, 서울에서 열렸던 '한 여름 밤의 발레 축제'에서 지젤 2막 2인무를 선보이고 있는 나가히사 메이(위)와 전민철. ⓒBAKi
8월 말, 서울에서 열렸던 '한 여름 밤의 발레 축제'에서 지젤 2막 2인무를 선보이고 있는 나가히사 메이(위)와 전민철. ⓒBAKi
마린스키 발레단 선배인 나가히사에 대해 전민철은 “디테일에 완벽을 기하는 똑똑하고 깊이 있는 무용수”라고 말했다. “메이는 동작의 퀄리티와 음악성이 정말 압도적이에요. 일상에서 정리정돈을 잘하는 모습처럼 작품과 역할에 대한 해석도 굉장히 깊고 주관이 뚜렷하죠. 동작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 자체가 되어 무대 위 풍경과 분위기까지 상상하며 연기해요. 어린 나이임에도 그 정도의 깊이에 도달했다는 점, 선이 길고 아름다우면서도 그 안에 다양한 얼굴을 담아내는 모습에서 무용수로서 정말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어린 나이에 해외 생활을 시작한 나가히사에게 받은 야무진 인상도 털어놨다. “발레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정리정돈을 굉장히 잘하더라고요!”(웃음)

전민철이 말한 ‘정리정돈’은 어쩌면 나가히사의 춤을 설명하는 꽤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동작을 덜어내면서도 음악과 인물의 감정을 놓치지 않는 것. 마린스키라는 전통의 중심에서 다져온 클래식의 기반 위에 자신의 해석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나가히사의 강점이다. 나가히사는 2017년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한 뒤 퍼스트 솔리스트로 성장했다. <지젤>, <라 실피드>, <잠자는 숲속의 미녀>, <로미오와 줄리엣>, <라 바야데르> 등 고전 레퍼토리와 발란신의 <주얼스>, <심포니 인 C> 등 네오클래식 작품을 폭넓게 소화해왔다..

성취보다 중요한 것

마린스키의 새 시즌을 시작한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의외로 화려한 성취가 아니었다. ‘부상 방지’와 ‘과정의 가치’였다. 옆에 있던 전민철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민철은 “마린스키는 공연 수가 많고 리허설 시간이 짧아 자칫 몸을 상하기 쉽다”며 “마린스키에서 현대발레 신작 등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는데, 과정에 충실하며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말했다.

나가히사 역시 “눈앞의 성과에 매몰되기보다 무대에 서기까지의 과정과 통과점을 잘 지나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며 “지난 시즌 부상을 경험했기에 몸 관리의 소중함을 더욱 느낀다”고 덧붙였다. 화려한 무대 위 몇 분을 위해 무용수는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몸의 작은 신호에 귀 기울이며, 때로는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 번의 공연을 완성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는 수많은 과정이다. 나가히사가 새로운 배역에 도전하고 전민철이 마린스키에서 자신의 레퍼토리를 넓혀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 모두 이미 화려한 무대에 서고 있지만,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난달 서울 이태원 몬드리안 호텔에서 만난 마린스키발레단의 나가히사 메이(왼쪽)와 전민철. 문경덕 기자
지난달 서울 이태원 몬드리안 호텔에서 만난 마린스키발레단의 나가히사 메이(왼쪽)와 전민철. 문경덕 기자
올해 한국 무대에서 여러 레퍼토리를 함께 선보인 두 사람. 서로의 시선과 동작에 집중할 때 최상의 시너지가 나온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다. 언어가 달라도, 춤의 스타일이 달라도 무대 위에서는 몸이 먼저 상대에게 말을 건다. 전민철이 나가히사에게서 배운 것은 특정 동작이나 파트너링의 기술만이 아니었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역할을 해석하는 방식, 무대에 오르기까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루는 법까지 몸소 보여준다. 나가히사에게도 전민철은 자신이 가진 경험과 정보를 나누는 동시에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하게 하는 파트너였다. 나가히사는 말했다. “평소 민철과 소통할 때는 영어와 러시아어를 섞어 씁니다. 하지만 춤을 출 때는 말이 필요 없어요. 발레가 그런 예술이잖아요.”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