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콩쿠르에서 '지젤'을 연기한 이래 이 작품은 제 마음속 1번이었어요. 잠잘 때 지젤이 된 제 모습을 수없이 꿨고 아침엔 '역시 현실이 아니구나'하며 눈을 뜰 정도였죠. 막상 진짜 제 역할이 되니 실감이 안나서, 혹독하게 훈련하고 있습니다."

지난 28일 서울 서초구 N스튜디오에서 만난 국립발레단원 이하연(31)은 한국경제 아르떼와 만나 전막 발레 '지젤' 첫 데뷔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이하연은 추석 연휴에도 연습실을 지키며 구슬땀을 흘렸다.
"지젤을 뼛속까지 꿰뚫었죠"…국립발레단 이하연의 단단한 도약
시골 소녀 '지젤'과 알브레히트 공작의 사랑, 배신, 용서를 그린 이 작품은 국립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다. 다음달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10월 13일~18일)은 김주원 신임 단장(49)이 이끄는 첫 정기공연이다. 김 단장은 현역 시절 국립발레단에서 '주원지젤'이란 별명을 얻으며 전석 매진 신화를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 단장은 첫 정기공연에 파격적인 캐스팅을 선보였다. 주인공 지젤에 코르드발레(군무) 단원을 대거 기용한 것. 이하연도 그 중 하나다. 인터뷰에 앞서 만난 김 단장은 이하연에 대해 "지젤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은 무용수"라며 "테크닉은 물론 연기력도 출중해 무대가 기대된다"고 신뢰를 보냈다. 정기공연 포스터에 그의 사진을 내보낼 정도로.

'지젤 장인'이 쌓아 올린 탄탄한 내공

이하연은 자타공인 '지젤 장인'이다. 2018년 연수단원을 거쳐 2020년 입단한 이래 시골 처녀부터 2막의 윌리들(처녀 귀신 군무), 투 윌리(귀신들의 리더격), 심지어 지젤의 엄마까지 작품 속 거의 모든 역할을 거쳐왔다. 지난해엔 객원 주역으로 지젤이 됐던 박세은(파리 오페라 발레)의 엄마 역할을 하기도 했다. "1막 마지막, 지젤이 광란 속에 쓰러지면 관객은 모르게, 엄마가 실핀을 풀어주거든요. 어떻게 하면 지젤이 더 예쁘게 머리를 흩날릴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하나하나 풀었습니다." 작은 디테일 하나에도 진심을 다했던 시간. 무대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꿰뚫게 된 그에게 드디어 주역의 기회가 왔다. 서울 공연에 앞서 지난 18일 평택에서 지젤 데뷔전을 무사히 치렀다.

1막에서 세상을 떠난 지젤은 2막에서 처연한 윌리(귀신)가 된다. 걸음걸이부터 중력을 전혀 받지 않는 듯 가벼워야 하고, 엄청난 힘을 쓰면서도 힘든 티를 내서는 안 되는 고난도 구간이다. 반면 1막의 지젤은 수줍고 여린 순수한 시골 소녀다. '왈가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털털한 그에게 수줍음을 표현하는 일은 큰 도전이었다. 알브레히트에게 안기거나 꽃점을 치기 위해 이파리를 뜯는 사소한 제스처 하나까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지젤을 뼛속까지 꿰뚫었죠"…국립발레단 이하연의 단단한 도약
이하연의 상대역 알브레히트로는 수석무용수 김기완(37)이 함께 한다. 그는 넓은 포용력으로 무대의 중심을 받쳐주며 이하연이 감정선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끈다. 이하연은 김기완과 리허설을 통해 "기교나 감정에만 치우치기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 동작이란 걸 되새긴다"고 했다. 이하연은 스스로에 대해 "타고난 조건의 무용수는 아니기에 남들보다 더 연습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김주원 단장은 이하연의 오랜 롤모델이다. 김 단장의 과거 영상을 찾아보며 예쁜 라인을 따라 하려 애썼던 그에게, 이번 작업은 감동 그 자체라고. 이하연은 "(김주원 단장님이) '저의 해석과 제안을 받아주시고 신나게 이끌어준다"고 했다. 이어 "여러 각도에서 제 움직임을 바라본 뒤 함께 고민해주시는 세심한 가르침이 매 순간 큰 힘이 된다"고 마음을 전했다.

한계를 넘어, 무대 위에서 피어나다

학창 시절 "신체 조건이 좋지 않으니 해외에서 컨템퍼러리 작품을 추라"는 말을 들었던 그는 해외로 나갔다. 졸업 직후 홀로 유럽으로 날아가 70일간 오디션을 보며 버틴 시간 속에는 무용을 향한 근성이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국립발레단으로 이끌었다. 유럽 무대를 접고 귀국한 바로 다음 날 연수단원 오디션 공고를 봤고 바로 합격해 오늘에 이르렀다. 슬럼프를 깊게 겪을 겨를도 없이 발레로 울고 웃으며 여기까지 달려온 이하연. 주역을 해보니 군무가 주었던 무게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는 그는 여전히 초심을 강조한다.
"지젤을 뼛속까지 꿰뚫었죠"…국립발레단 이하연의 단단한 도약
"지젤의 모든 순서, 등장인물들을 뼛속까지 꿰뚫었어요. 그렇기때문에 나 혼자 튀는 지젤이 아니라 무대 위 동료들과 함께 숨 쉬는 지젤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또 '이하연은 지젤을 이렇게 해석하는구나'하는 새로움을 발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하연의 무대는 10월 14일과 17일에 만나볼 수 있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사진=김범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