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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못하면 저렇게 돼"…욕 먹던 소년가장의 '대반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과거 대신 그림 택한 겸재 정선
국민화가 반열에 올라
탄신 350주년 대구간송미술관전
국민화가 반열에 올라
탄신 350주년 대구간송미술관전
17세기 말 한양(서울)의 최고 부촌. 그 동네 사람들은 겸재 정선(1676~1759)이 사는 집을 두고 아마 이렇게 수군댔을 겁니다. 정선의 가문이 대대로 과거 시험에 떨어지면서 몰락한 집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공부 말고도 성공할 길이 많습니다. 기술을 배우거나 사업을 할 수도 있고, 유튜버나 연예인, 스포츠 스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큰 부자 중 적잖은 이들이 공부와는 별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달랐습니다. 선비·농부·장인·상인 순으로 귀천을 매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회. 취업해서 연봉을 많이 받는다거나, 사업으로 부자가 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성공하려면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했지요.
그런데 정선은 그림 하나로 성공을 거머쥐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 벼슬도 지냈고, 죽은 뒤에는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 벼슬도 받았습니다. 공부만이 정답이던 조선에서 그림으로 자수성가한 조선 최고의 화가. 지금 대구간송미술관에서는 그를 조명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겸재 정선의 삶을 돌아봅니다.
공부 못하는 집
정선은 1676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효자동 일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 경복고등학교가 있는 곳이 그의 집 자리입니다. 가정형편은 좋지 않았습니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3대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정선이 열세 살이던 168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후 정선과 가족은 같은 동네에 사는 외가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어렵게 산 것으로 추정됩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정선의 집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동네 어른들도 분명히 있었겠지요. "공부 안 하면 저 집처럼 된다."
이런 대우를 받던 정선은 간절히 성공을 원했습니다. 보란 듯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자신을 몰락한 양반이라 무시하던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공부에 '올인'할 만한 여유가 없었고, 과거에 합격할 만큼 뛰어난 공부 머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선은 화가의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끊임없이 그림 실력을 갈고닦았습니다. 이웃집에서 얻은 중국의 그림 교본을 베끼면서요.
조선 최고의 부자 동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각종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서울 쏠림 현상'이 끊임없이 언급됩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조선에서도 '한양 쏠림 현상'이 엄청나게 심했거든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반드시 한양에 붙어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마라."사람들이 한양으로 몰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과거 시험이었습니다. 과거 시험에는 정기 시험 말고도 별시라는 시험이 따로 있었습니다. 세자가 태어나거나 책봉되는 등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갑자기 여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방에 살면 이런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제때 알고 응시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한양에 사는 수험생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덜한 시험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양에 살려는 사람은 갈수록 늘었고 집값은 치솟았습니다.
한양에서도 가장 집값 비싼 동네는 따로 있었습니다. 정선의 집안이 사는 북악산·인왕산 일대였습니다. 당시 '장동'이라 불린 이곳은 시내 조망이 좋았고, 경치도 아름다웠습니다. 높은 지대에 있어 홍수가 나도 쓸려나갈 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고관대작들의 일터인 궁궐과도 가까운 '직주근접'의 장점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강남이 당시 물난리가 잦은 미개발지라 인기가 없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가장 깊은 인연은 '동네 형'인 사천 이병연(1671~1751)이었습니다. 정선보다 다섯 살 위인 이병연은 평생 정선과 친구로 지내며 그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금강산 여행입니다. 관직에 오른 이병연은 1711년 금강산 아랫마을인 김화의 현감(지방관)을 지냈는데, 이 때 그가 정선을 금강산 여행에 초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선은 '인생 역전'에 성공합니다.
그림으로 벼슬길에 오르다
당시 조선 양반 사회에서 금강산 여행은 일종의 '버킷리스트'였습니다. "죽기 전에 금강산은 꼭 가 봐야 한다"는 말이 돌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금강산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산이었습니다.하지만 막상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단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돈이 있다고 해도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차도 자동차도 없던 시절, 한양을 출발해 금강산과 인근 명승지를 둘러보려면 최소 한 달이 걸렸거든요. 돈이 있고 시간도 있는 은퇴자들에게는 체력이 문제가 됐습니다. 산을 걸어서 다녀야 하니까요.
그전에도 금강산 그림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화가들이 그리던 산은 대개 중국 화보 속 산을 따라 그렸거나 머릿속에서 지어낸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선은 자기 눈으로 본 산을 그렸습니다. 뾰족한 바위 봉우리는 가늘고 날카로운 붓질로 그렸고, 나무가 덮인 흙산은 짧은 점을 겹겹이 찍어 그렸습니다. 하얀 바위산과 검푸른 흙산이 서로를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금강산 그림으로 정선은 스타가 됐습니다. "그림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다더라." 그림을 그려 달라는 사람도 갈수록 늘었습니다. 자기 집을 그려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복을 비는 그림 부탁도 이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고슴도치가 오이를 등에 지고 달아나는 모습을 그린 '자위부과'는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씨가 많은 오이와 가시가 빽빽한 고슴도치 모두 다산(多産)을 상징하거든요.
이후 정선은 계속 벼슬을 이어 갔습니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습니다. 정선이 왕자 시절의 영조에게 그림을 가르쳤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지방관 생활을 하면서 정선은 전국 각지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금강산 여행으로 인생 역전의 기회를 준 이병연과의 우정도 이어졌습니다. 1740년, 64세의 정선은 양천(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 일대) 현령으로 부임했습니다. 헤어짐을 아쉬워한 두 사람은 "우리가 비록 몸은 멀리 떨어지지만,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 보면서 우정을 이어가자"고 약속했습니다. 그 뒤 1년여 동안 주고받은 그림을 묶은 것이 '경교명승첩'입니다.
금강산을 다시 그리다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글공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시대, '천한 재주'로 여기던 그림으로 벼슬길에 오른 정선을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729년 정선이 의금부 벼슬을 받자 "잡기(잡다한 재주)로 발탁된 사람"이라는 비판이 나왔고, 정선은 곧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1754년에는 사간원의 한 관리가 "정선은 천한 기예로 이름을 얻고 잡된 길로 벼슬에 올랐으니 내쫓아 달라"고 상소를 올린 적도 있었습니다. 정선은 한 달 뒤 병을 이유로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지금 1000원짜리 지폐 뒷면 그림인 '계상정거도'도 비슷한 맥락의 그림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 퇴계 이황이 머물던 도산서당(도산서원)을 그린 그림입니다. 사실 정선은 이황의 후손으로, 이황의 손자의 외손자의 외손녀의 아들입니다. 물론 이 정도면 피가 진하게 섞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퇴계의 피가 128분의 1, 약 0.78%니까요. 그래도 정선은 퇴계와 자신의 연관성을 강조했고 늘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글이 아닌 그림으로 성공했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금강 입구의 절 장안사를 그린 30대 때 그림은 여러 소재들을 빼놓지 않고 옮겨 그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반면 1747년 그림은 세찬 물길과 그 위의 무지개다리, 숲에 묻힌 절과 맞은편 봉우리를 한 풍경으로 짜임새 있게 엮었습니다. 구성 측면에서 봤을 때 노년의 그림이 훨씬 뛰어나다는 게 간송미술관의 설명입니다.
붓을 묻으면 무덤
정선은 평생 수없이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안동 김씨를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의 세도가들은 물론 중국에서 파견된 외교관도 조선을 들를 때 정선의 그림을 자주 받아갔다고 전해집니다. 정선의 이웃이었던 조영석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정선이 쓴 붓을 묻으면 무덤을 이룰 지경이다." "전국에서 그림을 그려달라며 보내온 비단이 정선의 집에 가득 쌓였다."1756년, 80세의 정선은 종2품 동지중추부사에 오릅니다.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입니다. 80대에 접어들었지만 붓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이 무렵 그림인 '정양사'와 '금강대'에서 정선은 주변 봉우리를 과감히 지웠습니다. '금강대'에는 거대한 돌기둥 하나만 화면 한가운데 세웠습니다. 간송미술관은 이 그림들을 두고 "추상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듯하다"고 평가합니다.
정선의 화풍은 후배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는 국민 화가이자 조선의 화성(畵聖·그림의 성자),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불립니다.
이런 정선의 그림 216점이 지금 대구간송미술관에 나와 있습니다. 지난해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전시(165점)도 역대 최대급이었는데, 이번 전시는 그 규모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서울 풍경을 담은 '경교명승첩'은 그림 33점을 처음으로 모두 펼쳤습니다. 영국 런던의 한국 특별전에 나간 '인왕제색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주요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기사는 대구간송미술관 '겸재 정선 - 조선의 눈으로 조선을 그리다' 전시 해설, 호암미술관 '겸재 정선' 도록 및 해설,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 해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퇴우이선생진적첩' 해제, 승정원일기, 조영석(趙榮祏)의 '관아재고(觀我齋稿)'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휴재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앞으로는 한국 화가를 중심으로 비정기 연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연재를 비정기화하는 대신, 미술 소식과 취재 기사를 더욱 발빠르게 충실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토요일에 연재합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미술 소식과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계정 @syoung_art 에서도 최신 소식을 전합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