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열린 농심 오픈키친 행사에서는 볶음 너구리 맛을 구현해봤다. /사진=박상경 기자
이날 열린 농심 오픈키친 행사에서는 볶음 너구리 맛을 구현해봤다. /사진=박상경 기자
지난 16일 오후 서울 동작구 농심 본사 1층에 자리한 역사관 '창조관'. 안내를 맡은 현장 관계자가 1970년대 후반의 일화를 소개했다. "농심의 초기 사명은 롯데공업이었습니다. 롯데제과의 연장선이라는 인식을 벗고 독자적 기업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 고(故) 신춘호 창업주께서 '순박하고 정직해 인심이 넘치는 마음'이라는 뜻을 담아 '농심(農心)'을 제안하셨죠."

창업주 뜻에 따라 신제품 라면에 먼저 '농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TV 광고를 내보내 호응을 얻은 뒤 1978년 정식 사명 변경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창조관 곳곳에는 라면 시장의 판도를 바꾼 고비들이 기록돼 있었다. 1980년대 라면 시장 포화 전망 속에서도 과감히 세운 안성 스프 전문 공장과 기술개발연구소는 너구리, 안성탕면, 짜파게티, 신라면 등 농심의 핵심 스테디셀러 산실이 됐다.

당시 '우지(공업용 쇠기름) 파동 반사이익설'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농심은 1989년 우지 파동 사태가 일어나기 10년 전 이미 조리유를 식물성 기름인 팜유로 전면 교체한 상태였으며, 안성탕면과 짜파게티, 신라면이 연달아 흥행하며 사태 이전부터 이미 1위를 지키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식문화도서관'과 1만 권의 '스프 처방전'

'식문화전문도서관'은 1671년 정몽주가 쓴 '포은집' 등 고서와 북한 식품 서적, 국내외 전문 저널을 포함해 장서 4만여 권을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식품 도서관이다. /사진=박상경 기자
'식문화전문도서관'은 1671년 정몽주가 쓴 '포은집' 등 고서와 북한 식품 서적, 국내외 전문 저널을 포함해 장서 4만여 권을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식품 도서관이다. /사진=박상경 기자
창조관을 나와 연구동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농심의 연구개발(RD&) 기반을 보여주는 공간들이 이어진다.

2009년 문을 연 '식문화전문도서관'은 1671년 정몽주가 쓴 '포은집' 등 고서와 북한 식품 서적, 국내외 전문 저널을 포함해 장서 4만여 권을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식품 도서관이다. 2007년 신 회장이 "마케팅과 연구소가 붙어 있어야 시장에 맞는 제품이 나온다"며 본사로 이전시킨 R&D 연구소에는 현재 약 170명의 석·박사급 인력이 상주하고 있다.

도서관 옆 사료실은 1970년대부터 축적된 제품 개발 기록과 포장재 스크랩, 연구 노트 1만여 권이 보관된 대외비 공간이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연구원들이 눈금 종이에 손으로 빽빽하게 적어 내려간 수기 그래프와 배합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옛날 양파깡 포장지도 엿볼 수 있었다. /사진=박상경 기자
옛날 양파깡 포장지도 엿볼 수 있었다. /사진=박상경 기자
흥미로운 점은 농심 연구소에서 '레시피'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신 '처방전'이라 부른다. 비가 많이 온 해에는 고추의 매운맛이 약해지고, 원료 공급사가 바뀌면 원물의 풍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관능 검사를 거쳐 수시로 스프 배합비를 조정한다. 감에 의존하지 않고 정밀한 데이터로 맛을 균일하게 유지하는 농심만의 체계다.

단종된 '볶음너구리'를 주방에서 구현하다

이날 오픈키친의 마지막 순서는 연구원들과 함께하는 조리 시연 및 시식이었다. 주제는 단종된 추억의 메뉴를 일반 제품으로 재현하는 '모디슈머(Modisumer)' 체험이었다. 현재 국내에서는 판매가 중단됐지만 해외 시장에선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 '볶음너구리'의 맛을 '얼큰한 너구리' 봉지면으로 직접 구현해보는 자리였다.

연구실 조리대 앞에 손민정 농심 스프개발1팀 책임, 김용욱 면개발팀 선임, 이미리 면마케팅팀 선임이 나란히 섰다. 시연 모니터에는 너구리 1봉지와 굴소스 1스푼, 알룰로스 1스푼(또는 설탕 4.5g), 고추기름 0.5스푼이라는 단순한 준비물이 떴다.
볶음 너구리. /사진=박상경 기자
볶음 너구리. /사진=박상경 기자
조리법은 간단했다. 끓는 물에 너구리면과 다시마, 후레이크를 넣고 4분간 삶은 뒤 국물을 자작하게 남기고 따라낸다. 여기에 얼큰한 너구리 분말스프를 절반만 넣고 굴소스와 알룰로스를 한 스푼씩 더해 센 불에서 1분간 빠르게 볶아낸다. 마지막으로 불을 끈 뒤 고추기름 0.5스푼을 둘러 비벼내면 완성이다.

인덕션 위에 팬을 올리고 직접 조리해 맛을 봤다. 정식 제품 특유의 진한 해산물 풍미를 완전히 똑같이 재현하긴 어려웠으나, 굴소스의 감칠맛과 알룰로스의 단맛이 너구리 스프의 매콤한 해물 베이스와 맞물리며 과거 볶음너구리의 맛과 비슷해졌다.

소비자가 기억하는 단종 제품의 맛을 주방 양념을 통해 손쉽게 다시 불러내는 이 과정은, 수십 년간 쌓아온 라면 스프 배합 기술의 탄탄한 저변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느껴졌다.

박상경 한경닷컴 기자 highse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