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파트 모습.  /사진=연합뉴스
서울 아파트 모습. /사진=연합뉴스
"스무살이 되던 해 부모님 권유로 만든 주택청약종합저축 통장을 15년 넘게 매달 꼬박꼬박 넣었습니다. 가점도 차곡차곡 쌓았는데 최근에 미련 없이 해지했어요. 요즘 수도권에서 분양하는 아파트 분양가를 보니 당첨돼도 돈이 없어 어차피 못 사는 집들뿐이더라고요." (서울 성동구의 한 IT 기업에 다니는 30대 직장인 A씨)

한때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 필수 티켓'으로 통하던 청약통장이 30·40세대 사이에서 외면받고 있다. 수도권 아파트 분양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부모로부터 비빌 언덕(상속·증여)이 없는 직장인에게 청약 당첨은 '로또'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빚의 덫'이자 '남의 나라 이야기'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15일 한국부동산원 청약홈에 따르면, 지난 7월 31일 기준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주택청약종합저축 가입자 수는 총 1480만9224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1월 말 기준(1505만1077명)과 비교했을 때 불과 6개월 만에 24만1853명이 빠져나간 수치다. 매달 평균 4만 명 이상의 가입자가 청약통장을 깨고 시장을 이탈한 셈이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수도권 전역에서 통장 해지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경기도가 6개월 새 11만7094명이 줄어들며 가장 큰 감소 폭을 기록했고, 서울에서는 10만3663명이 청약통장을 깼다. 인천 역시 2만1096명이 감소세를 보였다.

더욱 뼈아픈 대목은 이탈을 주도한 연령대다. 생애 주기상 주택 구매 수요가 가장 왕성한 30~50대에서 청약통장 순감 현상이 집중됐다. 국토교통부 연령별 청약통장 가입 현황에 따르면 올해 들어 청약통장은 40대에서 12만 개, 30대와 50대에서 각각 11만 개씩 순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택 시장의 핵심 실수요층이자 허리 계층이 한목소리로 청약 시장에서 발을 빼고 있는 셈이다.

청약통장의 인기가 시들해진 가장 큰 원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분양가가 꼽힌다. 고금리 장기화와 원자재 가격 상승, 인건비 인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신규 아파트 공급 가격이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양평가 전문회사 리얼하우스가 청약홈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8월 수도권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당 1505만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리얼하우스가 관련 조사를 시작한 2021년 이래 처음으로 1500만원 선을 돌파했다.

특히 서울의 분양가 상승세는 압도적이다. 서울의 ㎡당 평균 분양가는 2468만원에 달한다. 이를 30대 가구가 가장 선호하는 전용면적 59㎡(약 25평)로 환산하면 평균 분양가가 15억9343만원에 이른다. 1년 전인 2025년 8월(12억4674만원)과 비교하면 1년 만에 무려 3억4669만원이 뛰었다.

이른바 '국민평형'으로 불리는 전용면적 84㎡(약 34평)의 평균 분양가는 19억4433만원으로 20억원 턱밑까지 바짝 다가섰다. 1년 전 평균 분양가였던 16억9934만원과 비교해 2억4499만원이 급등했다.
 25일 서울 시내 한 금융기관에 주택담보대출 안내문이 붙어 있다.  /사진=뉴스1
25일 서울 시내 한 금융기관에 주택담보대출 안내문이 붙어 있다. /사진=뉴스1
문제는 치솟는 분양가에 더해 촘촘해진 금융 및 대출 규제로 인해 당첨되더라도 잔금을 치를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서울 평균 전용 59㎡ 아파트(분양가 15억9343만원)에 당첨됐다고 가정하고 필요한 자기자본을 계산해 보면 현실의 벽은 더욱 명확해진다. 현재 규제지역 내 주택담보대출 한도는 시가 15억원 이하 주택의 경우 최대 6억원까지 가능하지만, 15억원 초과~25억원 이하 주택은 4억원, 25억원 초과 주택은 2억원에 불과하다.

서울 평균 전용 59㎡ 아파트는 분양가가 15억원을 초과하기 때문에 규제지역 담보대출 한도가 최대 4억원으로 제한된다. 여기에 분양 당첨 시 납부해야 하는 취득세(약 5258만원) 등 최소한의 부대비용을 포함하면, 청약 당첨자가 실제로 준비해야 하는 최소 자기 자금은 12억4601만원에 달한다. 대출을 한도인 4억원까지 끌어쓴다 하더라도 현금 12억5000만원 이상이 수중에 없으면 입주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청약을 통한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이른바 '청포족(청약 포기족)'이 속출하고 있다. 청약 가점을 쌓기 위해 십수 년간 무주택 자격을 유지하고 청약통장에 자금을 묶어두는 행위 자체가 실효성을 잃었다는 인식이 확산한 탓이다.

김선아 리얼하우스 분양평가팀장은 "인기 지역은 분양가가 높은데다 경쟁도 치열해 당첨이 쉽지 않은 반면, 미분양이 많은 지역은 청약통장 없이도 선택할 수 있는 물량이 적지 않다"며 "여기에 분양가 상승과 대출 규제까지 겹치면서 당첨 이후의 자금 부담도 커졌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청약통장을 오래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예전보다 낮아졌다고 보는 수요자가 늘어난 것이 가입자 감소의 한 원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