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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경제 목줄 쥔 일본?…엔화가 움직이면 미국이 흔들린다 [박신영의 월가 아나토미]
‘월가 아나토미’ 일곱번째 시간입니다.
세계 최대 경제대국은 미국입니다.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도 미국이고 달러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기축통화입니다.
그런 미국이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입니다.
일본은 현재 세계에서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해외 투자국입니다. 보유 규모가 1조달러를 넘습니다. 일본에서 출발한 막대한 엔화 자금은 미국 국채뿐 아니라 미국 주식과 회사채 등 글로벌 금융시장 곳곳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엔화 가치가 크게 움직이면 충격이 일본 외환시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미국 국채금리가 움직이고 미국 증시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미국 정부의 자금조달 비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최근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이 일본과 엔화 문제에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배경에도 이 같은 구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이 정말 미국 경제의 ‘목줄’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얽혀 있는 엔화와 미국 국채, 엔캐리 트레이드의 연결고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베선트 “이제는 내가 하우스다”
그는 “저에게는 비대칭적인 정보가 있습니다”라고 말한 뒤 “이제는 제가 하우스입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하우스’는 카지노의 하우스를 의미합니다. 카지노에서 장기적으로 가장 유리한 쪽은 손님이 아니라 카지노입니다.
베선트 장관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자신은 미국 재무장관으로서 일반적인 시장 참가자들보다 정책과 협상에 관한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만큼 자신의 정책 방향에 맞서 베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엔화 문제에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습니다. 미국이 일본 엔화 문제에 개입할 경우 일본은행(BOJ)과 일본 정책당국이 어떻게 움직일지 상당 부분 알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까지 내놨습니다.
미국 재무장관이 일본 엔화에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단순히 환율 때문만은 아닙니다. 엔화 뒤에는 미국 국채시장이 있고, 더 넓게는 미국 금융시장 전체가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2. 베선트의 핵심 과제는 장기 국채금리
베선트 장관의 경제정책을 이해하려면 미국 장기 국채금리의 중요성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정책금리를 결정하지만 미국 실물경제 곳곳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장기 국채금리입니다.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물론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비용에도 영향을 줍니다.
무엇보다 미국 정부가 부담하는 이자비용과 직결됩니다. 국가부채가 크게 늘어난 상황에서는 국채금리가 조금만 상승해도 정부의 이자 부담이 빠르게 커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기금리를 안정시키는 것은 베선트 장관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를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엔화 공동개입니다. 일본이 단독으로 움직이기보다 미국과 협조해 시장에 개입하면 상호 합의된 속도와 강도로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가 쉬워질 수 있습니다.
FIMA Repo도 있습니다. 해외 중앙은행들이 달러가 필요할 때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를 시장에 급하게 매각하지 않고도 달러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입니다.
미 재무부는 장기 국채 바이백도 확대하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기존 국채를 다시 사들이면서 유동성을 보완하고 시장 기능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입니다.
수단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목표가 있습니다. 국채시장에 불필요한 매도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을 막고 장기금리의 급격한 상승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3. 엔화가 약해지면 왜 미국 국채금리가 오르나
미국이 달러·엔 환율을 신경 쓰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본이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해외 국가라는 점입니다.
일본의 미국 국채 보유액은 1조1000억달러를 웃돕니다.
문제는 엔화 가치가 지나치게 떨어질 때 발생합니다. 달러당 엔화 환율이 계속 상승하면 일본의 수입물가가 오르고 국민들의 생활비 부담도 커집니다.
결국 일본 정부가 엔화 방어에 나설 수 있습니다. 엔화를 방어하려면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사들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합니다.
달러를 확보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외환보유액에 포함된 미국 국채를 매각하는 것입니다. 미국 국채를 팔아 달러를 확보한 뒤 그 달러로 엔화를 사들이는 방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미국 국채 매도 규모가 커지면 국채 가격은 하락하고 시장금리는 상승할 수 있습니다.
기존 국채의 쿠폰금리는 고정돼 있지만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은 변합니다. 새로 발행되는 국채의 금리가 높아지면 기존 저금리 국채의 매력은 떨어지고, 기존 국채 가격이 하락하면서 시장에서 거래되는 수익률은 상승합니다.
결국 엔화 약세가 지나치게 심해질 경우 일본의 환율 방어가 미국 국채금리를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미국 역시 엔화 약세를 무조건 방치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4. 일본은 어떻게 美 국채 최대 보유국이 됐나
일본이 막대한 미국 국채를 보유하게 된 배경에는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양국의 경제 관계가 있습니다.
1970~1980년대 일본은 세계적인 수출 대국이었습니다.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미국에 대량으로 수출하면서 막대한 무역흑자를 기록했고 그 결과 일본에 달러가 계속 쌓였습니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에는 엔화 가치가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엔화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일본 수출기업들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필요할 때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외환시장 개입을 반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달러 외환보유액이 늘었고 이를 운용할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미국 국채가 활용됐습니다.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의 초저금리가 장기화된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 국채 금리가 지나치게 낮아지면서 일본 은행과 보험사, 연기금 등은 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해외 채권에 투자했고 대표적인 투자 대상이 미국 국채였습니다.
일본은 2000년 미국 국채 최대 해외 보유국으로 올라섰습니다. 이후 중국이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바탕으로 일본을 추월했지만 중국이 미국 국채 보유량을 줄이면서 일본은 2019년 다시 1위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2024년 이후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BOJ가 마이너스 금리를 종료하면서 일본 국채 금리가 상승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장의 질문은 ‘일본이 미국 국채를 대규모로 팔 것인가’에서 ‘일본이 앞으로도 과거처럼 미국 국채를 적극적으로 사줄 것인가’로 바뀌고 있습니다.
일본 금리가 상승할수록 일본 투자자 입장에서는 환율 변동 위험과 환헤지 비용까지 감수하면서 미국 국채를 매입해야 할 유인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5. 미국 재정적자의 버팀목이 된 일본 자금
미국 입장에서 일본 자금은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미국은 레이건 행정부 이후 여러 차례 대규모 감세를 시행했습니다. 소득세와 법인세를 낮춰 경기 부양을 유도했지만 동시에 세입 기반은 약해졌습니다.
냉전기의 국방비 확대에 이어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최근의 우크라이나와 중동 관련 안보 지출까지 이어지면서 재정 부담도 커졌습니다.
고령화에 따라 사회보장 관련 예산과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등 의무지출도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재정적자가 확대되면 미국 정부는 부족한 자금을 메우기 위해 국채를 더 발행해야 합니다. 국채 공급이 늘어나면 일반적으로 가격에는 하락 압력이, 금리에는 상승 압력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일본을 비롯한 해외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를 꾸준히 사들이면 수요가 늘어나면서 금리 상승 압력이 완화됩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독특한 자금 순환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미국 소비자들이 일본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구입하면 달러가 일본으로 이동합니다. 일본은 이렇게 벌어들인 달러를 다시 미국 국채에 투자합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자금은 다시 미국 정부의 자금조달을 지원합니다.
이 구조가 수십 년 동안 미국 금융시장의 중요한 버팀목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6. 일본의 美 국채 보유액 1조1167억달러
2위 영국은 약 9399억달러, 3위 중국은 약 6334억달러입니다. 일본과 중국의 격차도 상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보유액만이 아닙니다.
미국은 앞으로도 막대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야 합니다. 결국 누군가는 이 국채를 사줘야 합니다.
미국 내 은행과 펀드, 보험사 등이 국채를 매입하겠지만 해외 투자자의 역할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대 해외 보유국인 일본이 미국 국채를 대규모로 매각하지 않더라도 신규 매입 속도를 낮추는 것만으로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7. 美 금융시장에 퍼진 ‘값싼 엔화’
일본의 영향력은 미국 국채에 그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엔캐리 트레이드입니다.
일본은 오랫동안 금리가 매우 낮았습니다. 투자자들은 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린 뒤 이를 달러로 바꾸고 미국 국채나 주식, 회사채 등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자산에 투자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0%에 가까운 금리로 돈을 빌린 뒤 미국에서 수%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면 양국의 금리 차이가 투자 수익의 원천이 됩니다.
이 때문에 엔화는 오랫동안 글로벌 금융시장의 대표적인 ‘펀딩 통화’, 즉 자금조달 통화 역할을 했습니다.
BOJ의 초저금리 정책이 일본 국내 경제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사실상 글로벌 금융시장에 값싼 자금을 공급해온 셈입니다. 미국 주식과 채권 역시 이 같은 자금 흐름의 수혜를 받았습니다.
8. 엔캐리 트레이드는 어떻게 커졌나
엔캐리 트레이드는 일본의 버블 붕괴 이후 본격적으로 확대됐습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급등하는 버블이 발생했고 1990년대 초 버블이 무너졌습니다.
BOJ는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금리를 계속 낮췄습니다. 1995년 단기금리는 약 0.5%까지 떨어졌고 1999년에는 사실상 제로금리 정책에 들어갔습니다.
2001년에는 양적완화를 시작했습니다. 2013년 아베노믹스 이후 대규모 금융완화가 이어졌고 2016년에는 마이너스 금리까지 도입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일본에서 매우 싼 비용으로 돈을 빌릴 수 있는 환경이 이어지면서 엔캐리 트레이드가 성장했습니다.
특히 2022년 이후 미국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리는 동안 일본이 초저금리를 유지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가 크게 확대됐습니다.
엔화를 빌려 달러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의 매력이 그만큼 커졌고 엔캐리 트레이드 규모도 확대됐습니다.
9. 엔캐리 자금, 도대체 얼마나 될까
엔캐리 트레이드의 정확한 규모를 계산하기는 어렵습니다.
엔화를 빌려 미국 국채를 산 자금도 있고 주식이나 회사채에 투자한 자금도 있습니다. 파생상품을 통해 투자된 자금도 있어 추정 방식에 따라 숫자가 크게 달라집니다.
국제결제은행(BIS)을 기반으로 한 추정 가운데 하나는 2024년 8월 시장 충격 직전 FX 캐리 트레이드 규모를 약 40조엔, 약 2500억달러 수준으로 봅니다.
또 다른 BIS 통계를 보면 2021년 말부터 2024년 1분기까지 FX 스왑과 선물 등을 통한 순엔화 공급 증가분은 약 66조엔, 약 4350억달러에 달합니다.
범위를 더 넓히면 숫자는 더욱 커집니다.
제프리스가 BIS 데이터를 활용해 국경을 넘은 엔화 차입 전체를 분석한 결과 2026년 3월 기준 약 360조엔, 약 2조3400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다만 이 금액 전체를 엔캐리 트레이드로 볼 수는 없습니다. 기업금융과 무역금융 등에 사용된 자금도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10. 엔화는 너무 약해도, 너무 강해도 문제
미국과 일본 금융시장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엔화는 지나치게 약해도 문제이고 너무 빠르게 강해져도 문제입니다.
먼저 엔화가 지나치게 약해지면 일본의 수입물가가 상승합니다. 일본은 에너지와 원자재를 상당 부분 수입하기 때문에 고유가까지 겹치면 부담은 더욱 커집니다.
결국 일본 정부가 엔화 방어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 과정에서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 국채를 매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미국 국채금리를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엔화가 너무 빠르게 강해져도 위험합니다.
BOJ가 금리를 빠르게 올리고 엔화가 급등하면 엔캐리 트레이드의 수익 구조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엔화를 빌려 미국 주식과 채권을 매입했던 투자자들은 포지션을 줄이게 됩니다. 미국 자산을 팔고 엔화를 사들여 빌린 돈을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미국 주식과 채권에 매도 압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미국과 일본 모두 엔화를 어느 한쪽 방향으로 급격하게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11. 1998년 일본의 美 국채 매각이 보여준 충격
과거에도 일본의 외환시장 개입이 미국 국채시장에 직접 영향을 미친 사례가 있습니다.
1998년 4월 일본은 엔화 약세를 방어하기 위해 미국 국채를 매각해 달러를 확보했습니다. 규모는 약 121억달러였습니다.
당시 시장 반응은 상당했습니다.
3개월물 미국 국채금리는 5.05%에서 5.16%로 하루 만에 11bp 상승했습니다. 2년물 금리는 5.48%에서 5.56%로 8bp 올랐고 30년물 금리도 5.88%에서 5.93%로 5bp 상승했습니다.
일본이 엔화를 방어하기 위해 취한 조치가 미국 국채시장 금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입니다.
12. 2024년 8월에는 반대로 美 증시가 흔들렸다
반대 방향의 충격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4년 8월입니다.
당시에는 엔화 약세가 아니라 급격한 엔화 강세가 문제가 됐습니다.
BOJ의 정책 변화와 미국 경기 우려가 겹치면서 엔화 가치가 빠르게 상승했고 시장에서는 엔캐리 트레이드가 대규모로 청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했습니다.
엔화를 빌려 투자한 사람에게는 엔화 가치 상승이 부채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엔화가 약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엔화가 갑자기 강해지면 같은 규모의 엔화를 갚기 위해 더 많은 달러가 필요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투자자들이 미국 주식을 팔아 엔화를 사들이면서 엔캐리 트레이드를 청산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매도가 또 다른 매도를 부르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2024년 8월 초 S&P500지수는 5568에서 5186까지 빠르게 하락했습니다. 8월 1일부터 5일까지 하락률은 약 4.7%였습니다.
물론 당시 증시 하락을 엔캐리 트레이드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경기침체 우려와 기술주 조정 등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습니다.
다만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금융시장 변동성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은 확인됐습니다.
13. 엔캐리 청산 때 왜 기술주가 주목받나
엔캐리 트레이드가 청산될 때 기술주와 반도체주가 특히 거론되는 이유도 있습니다.
엔캐리는 기본적으로 매우 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려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자산에 투자하는 거래입니다. 최근 몇 년간 미국 시장에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대표적인 자산 가운데 하나가 AI와 대형 기술주였습니다.
엔캐리 거래에는 글로벌 매크로 펀드나 CTA 등 레버리지를 활용하는 투자자들도 참여합니다. 이들은 상승 모멘텀이 강하면서 거래량이 많아 필요할 때 빠르게 현금화할 수 있는 대형 기술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술주의 시장 비중 자체가 커졌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엔화가 갑자기 강해지면서 엔캐리 포지션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투자자들은 미국 자산을 팔아 엔화를 다시 사들여야 합니다. 이때 규모가 크고 유동성이 풍부한 대형 기술주가 매도 충격의 주요 경로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엔캐리 자금 가운데 정확히 얼마가 엔비디아나 특정 반도체주에 투자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식 통계는 없습니다.
따라서 ‘엔캐리 자금이 기술주에 얼마 들어가 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엔캐리가 급격하게 청산될 경우 기술주와 반도체주가 충격을 증폭시키는 주요 경로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합니다.
14. 베선트가 직면한 딜레마
베선트 장관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한쪽에는 미국 국채금리 상승 위험이 있습니다.
엔화가 지나치게 약해지면 일본이 외환시장에 개입하면서 미국 국채를 매각할 수 있습니다. 일본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 신규 매입을 줄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미국 국채금리에 상승 압력을 줄 수 있습니다.
반대쪽에는 미국 증시가 있습니다.
BOJ에 빠른 금리 인상을 압박하고 엔화를 급격하게 강세로 만들 경우 엔캐리 트레이드가 빠르게 청산되면서 미국 증시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결국 베선트 장관은 미국 국채금리와 미국 주식시장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엔화를 어느 정도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지만 지나치게 빠른 강세는 피해야 합니다. 반대로 엔화를 지나치게 약한 상태로 방치하기도 어렵습니다.
엔화 문제가 단순히 일본의 통화정책 문제가 아니라 미국 금융시장의 안정과 직결돼 있는 이유입니다.
15. 일본이 미국에 마음대로 ‘큰소리’ 칠 수 없는 이유
그렇다면 일본이 미국 국채를 1조달러 넘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요.이론적으로는 “계속 압박하면 미국 국채를 팔겠다”고 위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미국과 일본 경제가 너무 깊게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일본 기업들의 가장 중요한 시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본 기업들은 미국에 막대한 직접투자를 하고 있으며 자동차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 기업의 사업이 미국 경제와 연결돼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일본이 미국 국채를 대량으로 매각하면 미국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국채 가격이 떨어지면 일본이 계속 보유하고 있는 나머지 미국 국채의 가치도 하락합니다. 국채금리가 급등하면서 미국 증시까지 흔들리면 일본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이 보유한 미국 주식과 회사채 가치도 영향을 받습니다.
결국 일본이 미국 금융시장에 충격을 가하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에도 동시에 충격을 주는 셈입니다.
상대방이 타고 있는 배에 구멍을 냈지만 자신도 같은 배에 타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 번째는 안보 문제입니다.
미·일 동맹은 일본 안보의 핵심입니다. 중국의 군사적 부상과 북한 문제 등을 고려하면 일본이 경제 문제를 이유로 미국과 정면으로 충돌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막대한 미국 국채 보유는 분명 미국에 대한 영향력의 원천입니다. 하지만 일본이 필요할 때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무기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을 크게 흔들 경우 일본 역시 함께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 결국 더 큰 문제는 미국 내부에 있다
여기까지 보면 베선트 장관이 일본을 잘 관리하고 엔화만 안정시키면 미국 국채시장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 국채금리를 끌어올리는 더 큰 힘은 미국 내부에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란전과 중동의 지정학적 위험입니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중동의 지정학적 불안이 커지면 원유 공급에 대한 우려도 확대됩니다.
두 번째는 고유가입니다. 높은 유가가 장기간 이어지면 기업의 생산비와 운송비가 상승하고 결국 물가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재정적자입니다. 미국 정부가 대규모 적자를 계속 기록하면 이를 메우기 위해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해야 합니다. 국채 공급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면 장기금리에 구조적인 상승 압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관세입니다. 관세는 수입가격을 높이고 기업의 비용 부담을 키울 수 있습니다. 기업들이 비용 증가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면 물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요인은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됩니다.
인플레이션이 쉽게 내려오지 않으면 Fed가 기준금리를 빠르게 인하하기 어려워지고 장기 국채금리 역시 높은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커집니다.
따라서 베선트 장관이 일본을 압박해 엔화 문제를 해결하고 FIMA Repo를 활용하거나 국채 바이백을 확대한다고 해도 미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까지 모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은 분명 미국 국채시장의 중요한 변수입니다. 엔화의 움직임은 미국 국채와 증시를 동시에 흔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국채시장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일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 국채의 가장 큰 위험은 결국 미국 자신일 수 있습니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