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원자재 시장이 다시 한번 세계 경제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최근 원유, 금속, 곡물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의 움직임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FTSE 원자재 CRB지수’는 2008년 기록한 역대 최고치(474)를 넘보고 있다. 특히 이번엔 과거와 달리 복합적인 요인이 원자재 랠리를 이끌고 있다. 원자재 가격 안정에 훨씬 복잡한 해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 과거와 다른 복합 요인
CRB지수는 1957년 미국 상품조사국(CRB)이 28개 원자재 상품을 기준으로 산출한 지수다. 현재 지수를 구성하는 22개 품목은 에너지 39%, 농산물 41%, 산업금속 13%, 귀금속 7% 등으로 구성됐다. 원유 단일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23%에 달한다. 역사상 대부분의 원자재 랠리가 원유 랠리에 기초한 이유다.
이번엔 다르다. 9일(현지시간) 기준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배럴당 101달러 수준이다. 호르무즈해협 봉쇄 직후 배럴당 120달러를 넘어선 때와 비교해 낮은 가격이다. 하지만 구리와 알루미늄, 금, 은, 천연가스 등이 일제히 오르며 지수를 밀어 올렸다. 구리 선물 가격은 지난 1년 동안 47% 이상 올랐다. 금과 은은 각각 1년 전보다 20%, 50% 이상 상승했다. 최근 유럽 천연가스(TTF 기준) 가격은 100만BTU(열량 단위)당 23달러에 육박해 미국과 이란전쟁 전의 두 배 가까이로 올랐다.
과거 원자재 랠리는 대부분 한두 개 핵심 요인이 작동한 결과였다. 첫 번째 랠리는 1972년 소련의 대규모 곡물 매입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시작됐다. 이듬해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아랍 산유국이 원유 금수조치와 감산에 나서자 상승세가 에너지로 번졌다. 두 번째 랠리인 1979년에는 이란 혁명으로 유가가 두 배로 뛰었고, 금과 은 가격도 급등했다.
◇ 랠리, 대부분 경기침체로 마감
세 번째 랠리인 2008년에는 CRB지수가 사상 최고치에 도달했다.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 이상으로 급등했다. 2002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이어진 이른바 ‘신흥국 슈퍼사이클’ 영향이 컸다. 네 번째는 2009년 글로벌 양적완화와 중국의 대규모 부양책, 2011년 아랍의 봄이 만든 랠리다. CRB지수는 2011년 4월 370까지 다시 올랐다. 다섯 번째 랠리 때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글로벌 수요 폭발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겹치며 2022년 6월 CRB지수가 다시 300을 넘어섰다. 모든 상승 랠리에선 원자재 가격 급등이 물가를 밀어 올렸고,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뒤늦게 대응했다.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른 경기 침체로 수요가 꺾이자 원자재 가격은 하락했다.
이번에는 이란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이 막히고 유가가 뛰면서 지난 1월 323이던 CRB지수가 5월 400을 넘어섰다. 인공지능(AI) 이용 확산과 탈탄소에 따른 전력화로 데이터센터와 전기차용 구리 수요가 급증했다. 금과 은 등은 달러 가치가 흔들리면서 가격이 올랐다. 달러 자산의 대체 수단을 찾는 수요가 커지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금 매입이 크게 늘었다.
◇ 원자재 가격 안정 해법은
향후 가장 큰 변수는 역시 원유다. 최근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우회 원유 운송과 수출 회복으로 중동의 생산·교역이 내년 2분기에 전쟁 전 평균 수준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럴 경우 브렌트유 현물 평균 가격은 내년 하반기 배럴당 67달러까지 내려갈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골드만삭스는 중동 갈등이 내년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중동 원유 생산이 전쟁 전보다 하루 400만 배럴 적게 유지되면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120달러를 넘을 것으로 봤다.
구리는 전쟁보다 AI와 전력화가 가격 상승을 주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데이터센터는 서버만이 아니라 변전소, 배전망, 냉각설비, 비상 전원에 구리를 많이 쓴다.
신규 광산 개발에는 긴 시간이 걸려 가격이 올라도 공급 반응이 늦다. 금값은 달러 가치와 각국 통화 정책에 따라 움직일 전망이다.
금은 달러 가치 하락에 대응한 안전자산 수요가 있지만 물가가 국채 장기 금리를 밀어 올리면 이자를 주지 않는 금 가격의 상승 폭은 제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