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엔드도 '규모의 경제' 시대…'매시브 하이엔드' 부상
하이엔드 주거의 기준이 희소성에서 규모로 옮겨가고 있다. 세대 수를 줄여 가치를 만들던 시장에 수천 가구 규모의 대단지가 최상급 설계와 마감을 갖추고 등장하면서, '매시브 하이엔드(Massive High-end)'로 불리는 유형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최근 공급 계획이 알려진 하이엔드 주거는 수백 가구가 기본이고, 많게는 2,000가구에 육박하는 대단지까지 등장했다. 30가구 안팎의 고급 빌라가 하이엔드를 대표하던 10여 년 전과 비교하면 공급 형태 자체가 달라졌다.

국내 하이엔드 주거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치며 바뀌어 왔다. 1세대는 2000년대 초 등장한 도곡동 타워팰리스와 목동 하이페리온이다. 최고 69층의 초고층 설계와 출입 통제 시스템으로 기존 아파트와 선을 그었다. 당시에는 층수와 조망, 보안이 고급 주거를 가르는 기준이었다.

2세대의 화두는 프라이버시와 서비스로 옮겨갔다. 청담동 일대에 들어선 소규모 하이엔드 주거처럼, 입주민끼리 마주치지 않는 동선을 짜고 호텔식 컨시어지를 붙이는 방식이 주류였다.

다만 세대 수를 줄인 만큼 포기해야 하는 것도 분명했다. 대지가 좁아 조경을 넉넉히 두기 어렵고, 수영장이나 실내 체육시설처럼 면적을 많이 쓰는 커뮤니티는 계획 단계에서부터 빠졌다. 컨시어지 인력을 두더라도 비용을 나눠 낼 가구가 적어 관리비 부담이 크고 거래가 드물어 시세 기준을 잡기 어렵다는 점도 약점으로 꼽혔다.

이런 한계를 보완한 형태가 단지 규모를 갖춘 하이엔드다.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280가구), 갤러리아포레(230가구), 나인원한남(341가구), 한남더힐(600가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200~600가구 선에서 희소성은 지키면서, 소규모 주택으로는 담기 어려웠던 조경과 커뮤니티를 단지 안에 확보했다.

최근에는 그 규모가 다시 한 단계 커지고 있다. 수백 가구 수준을 넘어 1,000가구가 넘는 대단지에 하이엔드 상품을 그대로 적용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규모 자체를 상품 경쟁력으로 쓰는 ‘매시브 하이엔드’다.

규모가 커지면 단지 안에 넣을 수 있는 시설부터 달라진다. 수천 평 규모의 조경과 대형 수영장, 실내 체육시설은 부지가 확보돼야 가능하다. 주차도 마찬가지다. 세대당 주차 대수를 늘리고 주차 폭을 넓히려면 지하 공간의 절대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컨시어지와 조식처럼 운영 인력이 붙는 서비스는 가구 수가 많을수록 유지 비용 부담이 나뉜다.

거래에서도 차이가 난다. 가구 수가 적으면 손바뀜이 드물어 시세 기준을 잡기 어렵다. 반면 대단지는 거래 사례가 쌓이면서 가격대가 형성되고, 담보 평가나 매도 과정도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거주와 소유를 넘어 자산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는 이유다.

용산에서는 ‘더파크사이드 서울’이 이 흐름을 보여준다. 아파트 419가구와 오피스텔 775실로 구성되며, 입주민 전용 커뮤니티 ‘더파크사이드 클럽 by 로즈우드 서울’을 갖춘다. 내부 시설은 카페, 레스토랑, 라운지를 비롯해 피트니스, 요가, 사우나, 하이드로테라피풀, 골프클럽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며, 로즈우드 호텔이 운영을 맡아 차원이 다른 서비스를 선보일 계획이다.

성수동 옛 삼표레미콘 부지도 대규모 복합개발이 추진된다. 서울시는 지난 7월 28일 제13차 건축위원회에서 성동구 성수동1가 683번지 복합용지 개발사업을 통과시켰다. 지상 81층 규모 주거동에 공동주택 403가구와 오피스텔 61실이 들어서고, 지상 53층 규모 업무복합동에는 호텔 130실을 비롯해 업무·상업·문화시설 등이 함께 조성된다. 2027년 착공해 2032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된다.

양천구 목동에서는 ‘목동윤슬자이’가 시선을 끈다. 전용면적 114~203㎡, 총 651실이다. 지하 1~3층에는 조선호텔앤리조트가 직접 위탁 운영하는 약 3,000평 규모의 멤버십 웰니스 클럽 ‘콩코드 클럽 바이 조선(CONCORD CLUB BY JOSUN)’이 들어선다. 일부 호실은 복층형에 상하층을 분리한 입체적 공간으로 선보인다.
아크메르 동탄 스케치 이미지.
아크메르 동탄 스케치 이미지.
경기 남부권 주거 중심지로 꼽히는 동탄에서도 대단지 규모에 하이엔드 상품을 결합한 단지가 나온다. 경기도 화성시 동탄구 반송동 95·99번지 일원에 들어서는 ‘아크메르 동탄’으로, 지상 최고 49층, 7개 동, 1,808가구 규모다. 이 단지가 내세운 개념은 ‘펜트 스탠다드(Pent+Standard)’다. 최상위 평형에만 적용하던 상품을 전 세대로 넓힌다는 뜻으로, 대단지의 규모와 하이엔드 상품성을 함께 가져가겠다는 구상이다. 외관 디자인에는 에르메스, 샤넬 등과 협업한 디자이너 자나이나 미레이로가 참여했고, 세대 내부에는 쿠치네루베 주방가구와 리스토네 조르다노 원목마루, 한스그로헤 수전, 미라지 세라믹 등 유럽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적용될 예정이다. 전 세대 천장고 2.5m와 세대당 1.5대 수준의 주차면을 확보했으며, 너비 2.6m의 광폭 주차 공간도 1,000면 이상 계획됐다. 시공은 부산 해운대 엘시티와 서울 강남구 논현동 브라이튼 N40 등 고급 주거를 지어온 포스코이앤씨가 맡았다.

서울 주요 정비사업도 같은 방향이다. 재건축·재개발을 거치며 수천 가구 규모의 매머드급 단지로 거듭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가구 수가 늘어날수록 주거환경과 관리비, 자산가치 면에서 유리해지면서 '규모' 자체가 하나의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압구정 3구역은 최고 65층, 5,175가구로 계획됐고 약 4만5,000평 규모의 커뮤니티 ‘클럽 압구정’을 예고했다. 반포주공1단지 1·2·4주구를 재건축하는 ‘디에이치 클래스트’는 최고 35층, 5,007가구 규모로 국내 아파트 단지 최초의 실내 아이스링크와 오페라하우스를 계획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하이엔드의 조건이 세대 내부에서 단지 전체로 넘어오면서, 소규모 주택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조경과 커뮤니티, 주차, 서비스를 갖춘 대단지가 하이엔드 시장을 이끌고 있다”며 “규모는 단순히 세대 수가 아니라 입주민이 실제로 누리는 생활의 크기이고, 거래가 이어지며 값이 매겨지는 자산 가치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유오상 기자 osy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