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영화 잡설] 한국 극장은 역사의 피를 먹고 자란다
8월 한 달동안 ‘오디세이’와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가 국내 극장가를 주름 잡았다. 9월 중순까지 그 여세가 이어지겠지만 이후부터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다. 일단 방학이 끝났다. 요즘 같은 시대라도 개학 여부는 여전히 극장 흥행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 영화 몇 편이 빠르게 화제의 축을 가져 갈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허진호 감독의 신작 영화 ‘암살자들’이다.

그동안 한국에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아이템의 영화가 서너 편 있었다. 하나가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의 진상, 두 번째가 1987년 KAL기 폭파의 실체, 그리고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의 진실이다. 놀랍게도 배우 이정재가 아웅산 테러에 손을 댔다.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또 연출까지 한 데다 주연을 맡기도 한 2022년 영화 ‘헌트’는 아웅산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 내는 데 성공했다. 이 영화는 코로나19가 한창인 2022년에 개봉돼 ‘띄어 앉기’에도 불구하고 전국 관객 435만명을 모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천만 영화였다는 얘기다.

KAL기 폭파의 주범 마유미 이야기는 고 신상옥 감독이 1990년 ‘마유미’란 이름으로 만들었었다. 사실상 당시 정보기관인 안기부의 영화였다. 이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든 강제규 감독이 몇 년 전부터 준비해 왔으나 아직 시나리오 단계에 머물고 있다. 이제는 진실이 무서워서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요즘 세대에게 상업적으로 먹히겠느냐는 문제 때문에 안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KAL기와 관련해선 1983년 9월 1일 또 하나의 사고가 있었다. 대한항공 007편이 당시 소련의 전투기 공격으로 공중 폭파해 269명 승객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역시 조종사가 왜 소련 영공으로 비행기를 몰고 갔는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영화화 아이템으로 그동안 금기시까지 돼왔던 이야기는 또 있다.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다. 박정희·육영수 전 대통령 부부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유가족으로 여전히 생존해 있는 데다 당시 검사로 사건 조사를 진두지휘했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역시 입을 다물고 있는 상태다. 이 때문에 영화가 파악할 수 있는 진상의 범주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돼왔다. 무엇보다 문세광의 실체를 정확히 추적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이처럼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빙산의 일각만 드러나 있었다. 허 감독은 ‘암살자들’을 통해 사건을 수면 아래 거대한 빙하의 규모를 공개하는 셈이다. 제목이 왜 ‘암살자’가 아니라 ‘암살자들’일까. 거기에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수형에는 늘 조직의 음모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한국 영화는 현대사의 ‘피’를 먹고 자라 왔다. ‘그때 그사람들’이 그랬고, ‘서울의 봄’이 그랬다. ‘1987’도 1000만 관객을 모았다. 한국 관객들은 현대사를 그린 이야기를 좋아한다. 흥분하고 열광한다. 그건 어쩌면 공식의 언로(言路)가 여전히 원활하게 흐르지 않고 있다는 얘기이다. ‘암살자들’이 2026년 하반기 극장가에서 어떤 반응을 얻느냐 하는 것, 역시 지금의 한국 사회를 판단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