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인사이트] 기업은 실적보다 먼저 늙는다
“경쟁이 심해졌다. 수요가 꺾였다. 관세와 환율이 발목을 잡았다.”

기업 경영진들과 실적 부진과 성장 정체의 원인을 논의하다 보면 문제의 출발점을 외부 환경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시장 변화와 외부 변수의 영향은 분명하다. 그러나 같은 충격에도 기업의 결과가 갈리는 이유는 외부 환경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실적이 꺾이기 전부터 조직 안에서는 이미 변화의 신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줄고, 사람과 정보의 이동이 둔해지며, 조직의 경계가 두터워진다. 기업의 쇠퇴는 재무제표에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조직의 노화는 숫자보다 먼저 시작된다

조직이 활력을 잃으면 새로운 시도보다 기존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 된다. 유능한 인재가 새로운 직무와 사업을 경험할 기회는 줄고, 부서 간 경계가 높아지면서 현장에서 감지한 변화가 경영진의 판단까지 도달하는 속도도 느려진다.

노키아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스마트폰 전환기 당시 중간관리자들은 자사의 기술적 문제와 부정적인 정보를 인식하고도 이를 경영진에게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 상층부의 압박과 조직 내부의 공포가 부정적 정보의 공유를 위축시켰고, 경영진은 자사의 대응 역량을 실제보다 낙관했다. 문제는 위험을 전혀 몰랐다는 데 있지 않았다. 조직 곳곳에서 감지된 부정적인 신호가 경영진의 판단으로 충분히 연결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평시의 변화’

한국 기업의 변화 대응 속도는 세계적으로도 빠른 편이다.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팬데믹을 거치며 상황이 바뀌면 빠르게 판단하고 자원을 집중하는 역량을 키워왔다. 최근 AI 트랜스포메이션에서도 국내 기업들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기는 속도에서 글로벌 선두권에 있다.

그러나 빠른 대응력이 높은 조직 활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BCG가 기업들의 조직 활력을 진단한 바이탈리티 인덱스 리포트(Vitality Index Report)에 따르면, 한국 기업은 연구개발 모멘텀이나 인재 이동성에서 아시아·태평양 평균을 뚜렷하게 앞서지 못했다. 위기가 명확해진 뒤 조직 전체를 빠르게 움직이는 힘과, 평상시에 사람과 아이디어를 순환시키며 조직을 끊임없이 재생하는 힘은 별개의 역량이라는 의미다.

특히 고속성장기에 만들어진 조직 구조와 평가 체계는 빠른 확장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저성장과 산업 전환이 일상화된 지금은 오히려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기존 방식이 아직 통할 때 다음 성장축을 준비하고, 사람과 자원을 선제적으로 재배치하는 게 중요한 이유다.

위기가 오기 전에 조직을 바꾸는 법

조직 활력은 자연스럽게 유지되지 않는다. 실적이 좋을 때일수록 의도적으로 조직에 긴장을 만들어야 한다. 첫째, 지금의 경영 방식을 주기적으로 다시 점검해야 한다. 현재의 조직 구조와 인력 배치, 투자 우선순위가 여전히 유효한지 실적과 무관하게 다시 물어야 한다. 과거의 성공 경험을 미래의 전제로 두지 않는 것이 출발점이다.

둘째, 핵심 인재의 배치를 전략과 함께 바꿔야 한다. 성과가 검증된 인재를 기존 핵심 사업에 오래 두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니다. 새로운 성장 영역과 변화가 필요한 조직에 핵심 인재를 의도적으로 배치해야 새로운 시각과 역량도 함께 이동한다. 인재 배치는 인사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 실행의 문제다.

셋째, 조직의 이상 신호를 경영지표로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사업 제안이 줄고 있는지, 의사결정 단계가 늘고 있는지, 핵심 인재가 특정 조직에 고착되고 있는지 같은 선행지표를 재무지표처럼 상시 관리해야 한다. 문제가 숫자로 굳어진 뒤 대응해서는 이미 늦을 수 있다.

조직 활력의 원리는 기업의 AI 트랜스포메이션 여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AI를 도입한다고 경직된 조직이 저절로 민첩해지는 것은 아니다. 부서별 KPI와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 기존 업무 방식이 그대로라면 새로운 기술의 잠재력도 충분히 발휘되기 어렵다. 결국 AI 전환의 성패 역시 기술 자체보다, 조직이 새로운 기술에 맞춰 스스로의 일하는 방식과 의사결정 구조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기업의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 재무제표가 나빠지고 시장점유율이 떨어지기 전부터 조직은 이미 신호를 보낸다. 문제는 그 신호를 얼마나 일찍 읽고 움직이느냐다. 실적이 꺾인 뒤 조직을 바꾸는 것이 위기 대응이라면, 실적이 좋을 때 먼저 조직을 바꾸는 것이 경영이다. 기업이 오래 살아남는 힘은 위기를 잘 견디는 데서만 나오지 않는다. 위기가 오기 전에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조직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