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추천 뉴스
[토요칼럼] 폐버스는 죄가 없다
청년 분노케 한 '폐버스 주택'
주거 본질부터 잘못 짚었다
소셜 클럽된 브랜드 아파트
'문밖의 세계'가 중요해진 시대
차라리 문화 공간으로 썼다면…
청년 위한 '열린 거실' 고민해야
정소람 유통산업부 차장
주거 본질부터 잘못 짚었다
소셜 클럽된 브랜드 아파트
'문밖의 세계'가 중요해진 시대
차라리 문화 공간으로 썼다면…
청년 위한 '열린 거실' 고민해야
정소람 유통산업부 차장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이 청년 주거난의 대안으로 ‘폐버스 리모델링 주택’ 정책을 내놨다가 거센 후폭풍에 시달렸다. 그래도 해학의 민족이다. 청년들은 고급 아파트명을 패러디한 ‘래미안 버스티지’ ‘반포터 자이’ 등의 밈을 만들며 정치권을 호되게 조롱했다. 주거 공간을 제공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정책이 왜 이렇게까지 역풍을 맞았을까.
단순히 좁고 누추한 환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저 몸을 뉠 수 있는 작은 공간 하나면 청년들이 만족할 것이라 여긴 가벼운 발상이 화를 불렀다.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주거의 본질은 나를 둘러싼 벽의 유무가 아니라 문을 열고 나섰을 때 마주하는 주변 환경과의 연결성에 있다.
그러니 청년들이 아파트를 원하는 이유를 단순히 ‘좋은 방’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어떤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누구와 교류하는가 역시 무형의 자본이 된다. 축적된 일상은 취향이 되고, 인간관계가 되며, 다시 삶의 기회로 이어진다. 이런 경험의 차이는 통장 잔액처럼 당장 숫자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삶의 궤적에는 더 오래 남는다. 만약 정치권 구상대로 ‘폐버스 단지’가 들어섰다면 어땠을까.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삶은 더 피폐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양극화는 소득이나 주거 면적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 격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같은 도시에 살아도 누군가는 배타적인 환경에서 다채로운 삶을 누리고, 다른 누군가는 그 모습을 휴대폰 화면 너머로만 바라본다. 박탈감이 쌓여 생기는 소외감은 사회의 정신 건강을 병들게 한다. 이번 정책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거셀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재정상 모두에게 고급 아파트를 제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집이 제공하는 기능의 일부를 도시 곳곳에 나눠 놓는 일은 가능하다. 국내 도시들도 벤치마킹하는 프랑스 파리의 ‘15분 도시’ 정책이 대표적이다. 모든 집에서 15분 거리 내에 상점과 학교, 문화·체육시설, 녹지 등을 이용할 수 있도록 도시의 기능을 촘촘하게 배치해 사적 공간의 한계를 공공의 경험 인프라로 보완하는 것이다.
차라리 폐버스를 동네 문화공간이나 커뮤니티 거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면 어땠을까. 영국 런던에서는 빨간 2층 버스를 개조해 공원 등에서 운영하는 커뮤니티시설(빅 레드 버스 클럽)로 조성했고, 프랑스 일부 도시에선 폐버스를 이동식 도서관 및 영화관, 팝업 공간으로 바꿔 시민에게 개방했다. 버스가 가진 이동성을 살려 문턱 낮은 문화 인프라로 바꾼 것이다. 집 앞을 오가는 버스에서 젊은 층이 책을 읽고, 공연을 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조롱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인프라가 부족한 동네에서 이동식 편의점으로 쓰자고 제안했다면 어땠을까. 주거 문제의 만능열쇠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청년들에게 ‘방 밖의 세계’를 넓혀주는 보완재는 될 수 있었다.
영화 ‘프란시스 하’에서 20대 청년 프란시스는 높은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임시 거처를 전전하면서도 뉴욕을 떠나지 않는다. 무용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선 도시의 인프라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문밖을 나오면 공원이 있고, 무료 공연장과 미술관이 도처에 있으며, 이상을 함께 나눌 사람을 수시로 만날 수 있다면 청춘에게 비좁은 방은 잠시 거쳐 가는 관문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도시는 모두에게 ‘열린 거실’이 많은 곳이 아닐까. 평범한 젊은이도 문을 열고 나오면 더 다채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 ‘한남 더 휠’ 해프닝은 비록 조롱으로 막을 내렸지만, 청년을 위한 정치권의 고민은 그래서 계속돼야 한다. 멈춰 선 버스 안에 머물게 하는 대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진짜 ‘바퀴’를 달아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