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노동시장을 빠르게 재편하자 조세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대규모 일자리 감소에 따른 노동소득 축소로 세수 기반이 약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AI 혁신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줄어드는 세수를 어떻게 보완할지가 각국 조세당국의 미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소득세 대신 자본세 강화해야”
7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OECD 소속 31개국 세수에서 주로 임금에 부과하는 개인소득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23.7%였다. 고용주와 근로자가 모두 납부하는 사회보장기여금 비중은 25.5%였다. 조세와 준조세 상당 부분을 소득세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AI의 일자리 대체폭이 커질수록 세수가 감소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AI 확산에 따른 실직자를 지원하기 위해 고용 지원을 확대하거나 대규모 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정부의 재정 부담이 가중된다. 비영리단체 윈드폴트러스트는 “자국 노동자 소득이 해외 AI 서비스 제공 업체의 자본소득으로 대체되면 세수 유출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우려를 바탕으로 최근 학계에서는 자본 투자의 세제 혜택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대부분은 투자 유치와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기업 이익, 투자, 자본이득 등에 세율을 낮춰왔다. 미국 의회예산국에 따르면 근로소득에 대한 실효 한계세율은 27%인 반면 기업 신규 투자자산에는 14%, 기계·설비투자에는 4%가 적용된다. 더글러스 엘멘도프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AI 확산을 고려하면 자본 투자를 장려하기보다 노동 수요를 유지하는 정책이 더 중요하다고 볼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이른바 ‘컴퓨트세’ ‘토큰세’ 같은 아이디어도 주목받는다. 모두 AI 연산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구상이다. 과세 대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에 과세하거나 AI의 핵심 측정 단위인 토큰 사용량을 기준으로 기업과 이용자에게 부과하는 식이다.
이 같은 논의는 2017년 빌 게이츠가 제안한 로봇세 도입 아이디어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봇에 근로자와 비슷한 수준의 세금을 부과해 자동화로 줄어드는 세수를 보전하고, 이를 실직자 재교육에 활용하자는 취지다. 당시 로봇 정의가 모호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에 세금을 부과할 명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현실화하지 못했다.
◇AI 혁신 저해할 수도
AI나 자본에 대한 증세가 기업 투자와 혁신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반론도 적지 않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세금은 행동을 왜곡하기 때문에 자본이득세, 배당소득세, 법인세는 투자 유인을 약화한다”며 “이는 생산성 향상과 임금 증가, 생활 수준 개선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서 2017년 대규모 법인세 감면 조치는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로 연결됐다. WSJ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메타, 알파벳, 오라클 5개사는 318억달러 세제 혜택을 받았으며 그 이상을 AI 데이터센터 건설에 투자했다.
이에 소비세를 인상하는 내용의 세제 개편안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광범위한 제품에 소비세가 부과되면 소비는 줄어들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더 많은 현금이 저축과 투자로 이어지며 생활 수준을 높인다는 이유에서다. 아룬 아드바니 워릭대 교수는 “AI 생산성 향상으로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전반적으로 낮아진다면 현재 가격과의 차이에 소비세를 매길 수 있다”며 “AI가 임금 격차까지 줄인다면 소득세가 저소득층에 더 부담을 준다는 역진성 우려도 완화된다”고 말했다. 소비세는 판매 단계에서 부과되는 만큼 조세 회피가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이점으로 꼽힌다.
다만 FT는 “경제 정책은 장기적 번영을 뒷받침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AI로 인한 충격은 세금을 늘려 대응할 것이 아니라 재정지출로 해결할 문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