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태 칼럼] K반도체가 산으로 가지 않으려면
무협지에 종종 등장하는 이야기다. 별 볼 일 없는 문파나 무인이 우연히 절세의 무공 비급을 얻는다. 깊은 산 속에 숨어서 한 10년 죽어라 무공을 익히면 다행이지만, 대개는 기연(奇緣)을 만난 게 명을 재촉하는 일이 되고 만다. 강호엔 비밀이 없다. 정·사파 고수들이 비급을 노리고 몰려들면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고 멸문은 정해진 수순이다.

초격차 K반도체는 견줄 자가 거의 없는 초절정 고수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만난 건 기연을 얻은 것과 다름없지만 ‘운삼기칠(運三技七)’이다. 40년 넘게 쌓은 내공과 기량이 없었다면 잡기 힘든 행운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라는 ‘신병이기(神兵利器)’까지 손에 쥐고 있으니 무서울 게 없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실적 발표 때마다 믿기 힘든 수치를 내놓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둘러싼 움직임 때문이다. 노조는 파업 으름장 끝에 ‘n% 성과급’을 얻어냈고, 정치권은 초과 세수를 넘어 ‘초과 이윤’이라는 개념까지 들이밀며 이른바 ‘횡재세’를 걷을 생각에 바쁘다. 일부 정치인의 희망 사항인 줄 알았던 반도체 클러스터의 호남행도 ‘메가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현실이 됐다.

우리의 ‘반도체 잔치’ 소식은 세계 언론에 실시간 소개되고 있다. 그들이 과연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국은 대체 불가이니 파티를 열 자격이 있다”고 인정할까. 아닐 것이다. 한국의 부푼 지갑과 자신들의 물가를 끌어올리는 칩플레이션을 보면서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늘리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결심을 더 굳혔을 게 분명하다. ‘촉’이 좋은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지금처럼 (반도체) 가격이 오르면 지정학적으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았나. 하지만 ‘부자 몸조심’이 필요한 때 우리는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다가 빠르게 몰락한 ‘히노마루 반도체’라는 반면교사가 바로 옆 이웃에 있음에도 말이다.

얼마 전 한국경제신문이 ‘한·일 반도체 평행이론’이라는 기사를 통해 우려했듯 한국 반도체도 1980년대 일본처럼 미국 통상 압박의 직격탄을 맞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50% 이상, 메모리의 70% 이상을 차지하던 반도체 왕국이 이렇게 추락할 줄 40년 전의 그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일본 반도체 몰락을 놓고 미·일 반도체 협정에 발목을 잡혔다, 설계·제조에 각각 특화하는 수평분업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다 등 다양한 원인이 거론된다. 결국 그런 이유들을 관통하는 건 ‘자만’이다. 1989년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모리타 아키오 소니 회장과 함께 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 반도체의 힘으로 미국의 압박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듯 자만에 취하면 현실 분간을 제대로 못 하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에겐 자만해선 안 될 이유가 더 있다. 거대 시장을 등에 업고 무섭게 추격하는 ‘메이드 인 차이나’ 반도체의 존재다. 천하의 애플이 중국산 메모리 사용을 허용해 달라고 미 정부에 간청할 정도다. ‘칩 워’의 저자인 크리스 밀러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 칼럼을 통해 중국 정부와 연계된 기관들의 지분이 절반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칩플레이션의 해법이 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변화를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 K반도체에 가장 시급한 건 자만에 취해 자신도 노를 젓겠다는 얼치기 사공들을 하선시키는 일이다. 배가 산으로 가서 천재일우의 호기를 망치기 전에 말이다. 호남 반도체도 지금은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말하지만, 언제까지 갈지 모르는 일이다. 정치권이나 노조의 간섭을 차단하고 지원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K반도체의 운명과 국운이 걸린, 단군 이래 최대라는 이 대역사는 그래도 성공할까 말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