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도립극단과 국립극단이 명동예술극장에 올린 연극 ‘갈매기’.  충북도립극단 제공
충북도립극단과 국립극단이 명동예술극장에 올린 연극 ‘갈매기’. 충북도립극단 제공
현대 연극의 역사는 안톤 체호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그는 몇 가지 혁명을 일으켰다. 우선 연극 안에 ‘사건’이 없다. 체호프 이전의 연극은 영웅과 결투, 치정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뼈대였다. 체호프는 평범한 일상이 삶을 파괴하거나,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기력하고 방황하는 보통 사람들이 희극과 비극을 오가며 읊조리듯 나누는 잡담과 혼잣말이 대사의 전부다. ‘말해지지 않는’ 서브 텍스트, 이를 과장하지 않고 전달하는 ‘메소드 연기’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130여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연극계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건 안톤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첫 작품인 ‘갈매기’다. 1896년 초연 당시 거센 야유를 받았던 이 작품은 올 여름 각각 다른 해석으로 무대를 달구고 있다.

국립극단과 충북도립극단이 협업해 명동예술극장에 올린 연극 ‘갈매기’는 1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오는 9일부터는 배우 전미도가 출연하는 극단 맨씨어터의 ‘갈매기’가 서울 광진구 티켓링크 1975 씨어터에서 관객을 만난다. 이어 15~18일에는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퍼포먼스그룹153의 ‘갈매기 날다’가 국립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한 전원주택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고독과 열망이, 왜 지금 ‘갈매기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부딪혀도 나아가는 청춘들

국립극단과 충북도립극단의 연극 ‘갈매기’ 무대 위에선 거친 전자기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낯선 악기지만, 소리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유명 배우인 어머니의 독선에 반발하는 청년의 패기와 불안, 그리고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갈매기’는 새로운 예술을 꿈꾸는 꼬스쨔와 배우가 되기를 열망하는 니나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유명 배우인 어머니 아르까지나는 꼬스쨔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고, 꼬스쨔의 연인이었던 니나는 유명 작가 뜨리고린에게 빠져든다. 니나는 꿈과 사랑을 꿈꾸며 모스크바로 떠나지만 결국 좌절하고, 꼬스쨔 역시 예술과 사랑 모두에서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

연출가들은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고독과 불안,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현시점에 주는 메시지가 크다고 말한다. 연극 ‘갈매기’를 연출한 김낙형 예술감독은 작품의 핵심을 ‘존재를 증명하려는 의지’에서 찾았다. 그는 “지금은 자기 확신과 정체성을 끝까지 내세우기 어려운 시대”라며 “갈매기의 인물들은 사회와 계층, 세대의 벽에 부딪히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기 위해 끝까지 나아가는데, 이것이 관객들에게 주는 울림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겉으론 아닌 척하지만, 속으로는 많은 것을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지금 젊은이들의 불안과 반항을 일렉트릭 기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상을 이루지 못한 채 원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인물 마샤는 오늘날 청년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도록 했습니다.”

◇8월에도 이어지는 ‘갈매기 열풍’

이달 중순 공연되는 ‘갈매기 날다’의 연출 황미숙 퍼포먼스그룹153 대표 역시 좌절 속에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찾아 나아가는 인물들의 의지에 주목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 황 대표는 “지금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며 살아간다”며 “진짜 원하는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픔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상을 찾아가는 ‘삶의 연속’을 이야기하고 싶어 제목에도 ‘날다’라는 동사를 붙였다고. ‘갈매기 날다’는 등장인물을 한국의 현대인으로 옮기고,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에도 변화를 줬다. 원작 꼬스쨔에 해당하는 인물은 사랑과 예술의 좌절 끝에 죽는 대신, 상처를 딛고 다시 자신의 이상을 찾아 나선다.

불안의 시대, 다시 체호프…'갈매기 열풍' 이유가 있었네
한편 9일 개막하는 극단 맨씨어터의 ‘갈매기’(사진)는 배우 전미도의 8년 만의 연극 복귀작이어서 더 화제다. 2011년 관객과 평단의 열광을 끌어냈던 작품으로 15년 만에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우현주, 이동하, 이정열, 임철수, 박호산 등이 출연한다.

‘갈매기’는 김정 연출가가 새로 합류했다. 제 54회 동아연극상과 제 9회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그는 “아주 많이 지친 시기에 다시 체홉을 보게 됐고, 작품 속 모든 인물이 나 같았다. 대단할 것 없는 삶, 때가 탄 욕망이 새롭게 보이며 그 안에 얽힌 미세한 감정의 타래를 발견하는 희열을 느꼈다”고 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