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아파트 모습 / 사진=임형택 기자
서울 시내 아파트 모습 / 사진=임형택 기자
“장기수선충당금은 ‘눈먼 돈’이 아닙니다.”

최근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에는 “드라마 ‘아파트’ 속 장기수선충당금 묘사는 사실과 다르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장기수선충당금은 아파트 노후화에 대비해 소유주가 매달 적립하는 자금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전직 조직폭력배인 주인공(배우 지성 분)이 100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고급 아파트의 장기수선충당금을 빼돌리려다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된 뒤 오히려 아파트 비리를 파헤치는 내용이 그려진다.

드라마가 넷플릭스 시청 순위 상위권에 오르며 화제를 모으자 대한주택관리사협회 등 관련 단체는 “장기수선충당금과 주택관리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는 주민 문의와 민원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3일 경북 경산시 사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관리사무소 방화·폭발 사건도 장기수선충당금 등 관리비를 둘러싼 갈등이 발단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 전국 장기수선충당금 잔액 11조원

"'눈먼 돈' 아냐" 해명에도 민원 폭주…아파트 뒤집어진 이유
30일 국토교통부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전국 아파트의 장기수선충당금 누적 적립액은 11조924억원이다. 2015년 말 3조1722억원이던 적립액은 꾸준히 늘어 지난해 처음으로 10조원을 넘어섰다. 장기수선충당금은 승강기 교체, 외벽 도색, 배관 교체 등 공동주택 주요 시설을 장기수선계획에 따라 보수·교체하기 위해 매달 관리비의 일정 금액을 적립하는 자금이다. 적립 기준과 산정 방식은 관련 법령에 정해져 있다.

드라마처럼 장기수선충당금이 100억원 이상 쌓인 아파트는 현실에서는 흔치 않다. 집합건물 종합관리기업 우리관리의 분석에 따르면 누적 장기수선충당금이 100억원을 넘는 아파트 단지는 전국에서 일곱 곳에 불과하다. 경기 수원시 장안구 수원한일타운아파트가 184억8772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서울 강남구 타워팰리스1차(106억4578만원), 도곡렉슬(101억9549만원), 송파구 잠실트리지움(101억2068만원) 등이 뒤를 이었다.

장기수선충당금 규모는 아파트 가격보다 단지 규모와 준공 연도, 향후 대규모 공사 계획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우리관리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규모가 크고 준공된 지 오래된 단지일수록 적립액이 많다”며 “승강기 교체·외벽 도색 같은 대규모 공사를 마친 직후에는 적립금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 “장기수선충당금 운영 전문성 필요”

장기수선충당금은 공동주택관리법 등에 따라 사용 용도와 집행 절차가 엄격히 제한된다. 장기수선계획에 따른 사용계획서를 작성해 입주자대표회의 의결을 거쳐야만 집행할 수 있다. 장기수선계획은 준공 시점을 기준으로 40년을 내다보고 수립하며, 3년마다 의무적으로 검토·조정한다.

장기수선충당금은 관리비와 별도 계좌에 예치해야 한다. 매달 적립액과 사용액을 다음 달 말일까지 단지 홈페이지와 동별 게시판,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에 공개해야 하며, 매년 한 차례 이상 외부 회계감사도 받아야 한다.

정부는 장기수선충당금과 관리비 비리를 막기 위해 제도 개선을 이어가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5월 관계 부처와 함께 ‘공동주택 관리비 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하고 관리비와 장기수선충당금 부당 사용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기로 했다. 장기수선충당금을 둘러싼 횡령과 부적절한 집행 사례를 근절하려면 운영전문성 강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관리 산하 주생활연구소 관계자는 “입주자대표회의가 장기수선충당금 조정과 사용을 주도하는 구조인 만큼 컨설팅을 통해 전문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