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한 천부상.
온화한 천부상.
지금 전북 익산의 국립익산박물관 기획전시실에는 사진 한 점이 걸려 있다. 콧날은 희미하게 닳았고 뺨과 이마는 군데군데 깨져 나갔지만, 지그시 감은 눈에는 미소가 어린 모습. 1400년 전 백제 장인이 흙으로 빚은 천부상(天部像·부처와 중생을 지키는 수호신상)의 얼굴이다. 매끈하게 복원한 모습이 아니라 익산 제석사 터 인근 폐기장에서 출토될 당시의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다. 제목은 '온화한 천부상'. 사진가 한정엽이 찍었다.

이 작품은 '찾아가는 공예명작전' 중 지난 21일 개막한 호남·제주권 전시 '공유자산(Common Wealth)'의 출품작이다. 찾아가는 공예명작전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공진원)이 공예 명작 600여 점을 들고 전국 4개 권역 전시장 13곳을 도는 순회전. 호남·제주권은 지난 1일 막을 올린 충청권에 이어 두 번째 권역이다.

호남·제주권 전시 기획은 내년 청주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선정된 김예성 큐레이터가 맡았다. 참여 작가는 28명, 작품은 110여 점이다. 제목인 공유자산은 공예를 '감상하고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재료와 기술, 기억을 함께 쓰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모두의 자산'으로 보자는 뜻을 담았다. 전시는 재료의 성질을 마주하는 1부, 손에 쌓인 기술이 오늘의 조형으로 이어지는 2부, 쓰고 고치고 나누는 관계를 다루는 3부로 짜였다.
깨진 불상부터 돌하르방까지…네 도시 '얼굴' 담은 명작전
이번 전시의 특징은 순회하는 네 도시의 유산이 작품 안에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26년째 문화유산을 촬영 중인 한정엽은 천부상 외에도 임진왜란 때 승려 수군의 총지휘소였던 여수 흥국사의 '미소 띤 나한상', 담양 서봉사 터에서 나온 '수행하는 나한상'(광주),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옮겨져 있는 제주 돌하르방 등을 찍어 전주 수제 한지에 인화했다. 호남·제주권 전시가 열리는 네 도시의 '얼굴'들이다. 조민열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주목했다. 나무 건축의 짜임새를 돌로 구현한 석탑의 원리를 거꾸로 뒤집어, 부드러운 섬유가 시간과 압력을 견디며 돌처럼 단단한 입체로 굳어진 작품을 내놨다.

호남의 전승 공예를 이용한 현대적인 작품들도 나왔다. 국가무형유산 채상장 이수자 김승우는 얇게 저민 대나무에 색을 입혀 엮는 채상 상자를 옻칠 보석함으로 만들었고, 우산장 이수자 윤성호는 지우산에 조명을 결합했다. 김대성은 합죽선의 구조와 재료로 조명을 빚었다. 양웅걸은 음식을 보관하던 제주 전통 가구 '살레장'을 오늘의 공간에 놓일 수 있는 가구로 다시 만들었다. 김도헌은 제주의 붉은 화산송이(스코리아)를 유약 재료로 삼아 그릇 표면에 섬의 지형 같은 색과 질감을 남겼고, 장석현은 소멸해가는 푸레기법과 제주옹기로 항아리를 빚었다.
깨진 불상부터 돌하르방까지…네 도시 '얼굴' 담은 명작전
깨진 불상부터 돌하르방까지…네 도시 '얼굴' 담은 명작전
공예의 경계를 넓히는 작품들도 나왔다. 죽공예가 최지한은 브랜드 쇼핑백과 종이상자에 최소한의 손질만 더해 '담는 용품'으로 바꿨고, 최재욱은 버려진 비닐을 자르고 접어 장신구로 만들었다. 김예성 큐레이터는 도록 서문에 "전통은 과거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오늘의 삶 속에서 사용되며,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때 살아 있는 자산이 된다"고 적었다.

익산 전시는 8월 18일까지. 이후 여수엑스포컨벤션센터(오는 10월 3일 개막), 광주디자인진흥원(11월 20일), 제주 예술공간이아(내년 1월 20일)로 자리를 옮긴다. 관람은 전부 무료다.

*본 기사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