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위기에 빠진 미국 민주주의
미국은 지구촌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노예제 폐지, 출생시민권 제도,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 확대를 거쳐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이 제정되면서 법적 토대가 갖춰졌다. 하지만 제도적 평등이 사회·경제적 평등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이후 심화된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는 미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위기를 낳기 시작했다.

지난 50년간 심화된 경제적 불평등은 반민주주의 운동을 추동했다. 1970~2020년 상위 0.1%는 미국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몫을 두 배로 늘린 반면 하위 90%는 그에 상응하는 몫을 잃었다. 상위 1%를 제외하면 근로자 계층이 가져가는 몫은 전례 없이 감소했다. 평균적인 미국 근로자의 구매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매년 4400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린다. 2023년 노숙자는 77만 명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워런 버핏은 “계급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승리를 거두는 쪽은 부자 계급”이라고 말했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다. 경제적 불평등은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경제 양극화가 정치 양극화를 견인한다.

돈이 워싱턴 정치를 지배한다는 지적도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1인 1표 원칙이 1달러 1표 원칙으로 변질된 셈이다. 2010년 ‘시민연합 대 연방선거위원회 판결’이 분수령이 됐다. 대법원이 돈의 위력을 사실상 제도화했다. 대법원은 기업, 비영리 단체, 조합 등이 ‘PAC(정치활동위원회)’에 정치자금을 무제한 기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개인이 금전적 기부를 통해 스스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 권리를 인정했다. 실질적으로 공화당과 보수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월가와 부유층의 돈이 공화당에 쏟아져 들어왔다.

록히드마틴, 보잉 등 방산업체 ‘빅5’는 9·11 사태 이후 20년 동안 국방부 계약으로 2조달러 이상을 챙겼다. 2024년에만 로비자금으로 1억4800만달러를 썼고 945명 이상의 로비스트를 채용했다, 의원당 로비스트 2명, 로비자금 27만달러가 투입됐다. 선심성 정치가 실질적 예산 배분을 주도했다. 안보 예산이 잘사는 지역과 못사는 지역을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됐다.

소수에 의한 지배가 워싱턴의 뉴노멀이 됐다. 다수결주의의 전횡에 족쇄를 채우기 위해 설계된 소수자 보호가 다수결의 원칙을 억압하는 기막힌 역설을 창출했다. 하버드대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이를 ‘소수의 독재’라고 불렀다. 헌법 체계 속에는 반다수결제도가 다수 존재한다. 필리버스터와 상원 구성이 대표적이다. 인구 60만 명의 와이오밍주와 인구 3900만 명의 캘리포니아주는 똑같이 두 명의 상원의원을 뽑는다. 인구가 적은 농촌 주에서 인기가 높은 공화당이 득을 보는 이유다. 필리버스터는 또 다른 사례다. 1806~1917년 상원은 스무 차례만 필리버스터를 사용할 정도로 신중하게 권한을 행사했다. 1970년대 제도 개편 이후에는 상대 당을 공격하는 효율적 수단이 됐다.

대법원도 정치화됐다. 1968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대법원의 보수화 흐름이 계속됐고, 현재의 보수 우위 구조가 정착됐다. 보수적인 워런 버거, 윌리엄 렌퀴스트,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거의 60년을 이끌어오고 있다. 이념적으로 첨예한 판결은 거의 예외 없이 보수 6 대 진보 3으로 결정된다.

적극적 평등 실현 조치, 낙태권, 투표권 등 주요 사안에서 보수적 결정이 내려지면서 1960년대 이후 이뤄진 진보 운동이 큰 타격을 받았다. 2013년 ‘셸비 카운티 대 홀더 판결’에서 투표권법의 핵심 조항인 법 개정 시 사전 승인 요건을 무효화했다. 2022년 ‘돕스 대 잭슨 판결’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확립된 낙태권을 부인하고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의사결정 권리를 제한하는 헌법적 결정이었다. 주에 낙태 여부를 결정하도록 위임해 낙태권이 보수와 진보 진영의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도록 했다. 대법원이 인종·이념적 분열을 더욱 악화시키는 기관이 된 것이다.

공정하고 현명한 중재자로서의 권위를 상실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미국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다인종 민주주의를 통한 ‘인종의 용광로’로서 세계의 롤모델 국가인 미국은 과연 이대로 꺼지고 말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