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수석무용수 박선미
무대 위에 쏟아부은 시간, 마침내 현실이 된 왕관
박선미 '백조의 호수' 첫 주역 무대…커튼콜서 깜짝 승급
"견갑골부터 팔을 쓰는 감각을 만들려고 팔도 수십 번 돌려...
새 움직임 연구하려고 유튜브에서 영상도 찾아봤죠"
"박선미를 다음 시즌 수석무용수(Principal Dancer)로 승급합니다."
지난 15일 뉴욕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여름 시즌 마지막 주를 장식한 '백조의 호수'. 오데트와 오딜을 처음으로 맡아 무대를 마친 박선미(27)가 커튼콜을 하며 숨을 고르던 순간, 수전 재피 ABT 예술감독이 무대로 걸어 나왔다. 관객도, 박선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발표였다.
재피 감독은 "박선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대를 장악하고 모든 춤에 조용한 힘을 불어넣는 무용수"라며 "맡겨진 모든 도전을 훌륭히 해냈고,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고 승급 배경을 설명했다.
15일 뉴욕 메트오페라하우스의 '백조의 호수' 커튼콜에서 수전 재피 예술감독이 박선미(가운데)를 수석무용수로 승급했다. ⓒNir Arieli, courtesy of American Ballet Theatre
ABT 수석은 세계 정상급 발레단에서 무용수에게 주어지는 최고 등급이다. 더욱이 승급이 발표된 무대는 발레리나의 기량과 예술성을 모두 시험하는 대표 레퍼토리 '백조의 호수'였다. 순수한 백조 오데트와 치명적인 흑조 오딜을 한 무대에서 오가는 이 작품의 첫 주역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선미는 2021년 ABT에 합류한 지 5년 만에 최고 자리에 올랐다.
최근 전화로 한국경제신문과 이야기를 나눈 박선미는 "아직 현실감이 없다"며 운을 뗐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날 객석에 엄마가 계셨는데, 끝나고 처음 하신 말이 '수고했다'였어요. 그 한마디가 가장 크게 남았어요. 엄마는 객석에서 저를 보며 많이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발레리나 박선미. ABT 공식 홈페이지으스러지도록 던진 몸, 부상이 가져다준 뜻밖의 선물
화려한 승급 뒤에는 누구보다 치열했던 준비가 있었다. 사실 학생 시절부터 '백조의 호수'는 그녀에게 두려운 작품이었다. 특히 흑조는 어려웠고 긴장 탓에 실수도 잦았다. 어머니마저 "선미가 흑조를 출 때면 떠는 게 보인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무대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극복해야 했어요. 이번에는 완벽히 만들어보자는 생각밖에 없었죠. 하루하루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연습했어요. 견갑골에서부터 팔을 쓰는 감각을 만들려고 테라밴드를 움켜쥐고 팔도 수십 번씩 돌렸고, 새의 움직임을 연구하려고 유튜브에서 새 영상도 찾아볼 정도였어요."
백조와 흑조는 한 사람이 연기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이다. 동작이 몸에 익자 그녀는 음악 안에서 감정선을 하나씩 채워 넣기 시작했다.
흑조를 연기 중인 ABT 수석무용수 박선미. ⓒNir Arieli, courtesy of American Ballet Theatre.
그러나 완벽한 백조를 만든 것은 비단 피나는 연습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그녀는 정강이 스트레스 골절 직전까지 가는 부상으로 넉 달 넘게 무대를 떠나야 했다. 쉼 없이 달려온 무용수에게 찾아온 첫 공백은 절망적이었지만, 그 '멈춤'은 역설적이게도 그녀를 가장 단단히 다져놓았다.
"예전에는 무조건 많이 연습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치고 나니까 몸을 쉬게 하는 방법,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처음 배웠어요. 그 시간이 없었다면 그날의 '백조의 호수'도 없었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시작했던 발레. 처음에 좋아하지 않았던 발레가 삶의 중심이 된 데에는 스승들의 존재가 컸다. 특히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교육원에서 만난 은사 조주현 교수는 어린 박선미의 가능성을 알아봐 준 인물이다. "조 교수님은 제가 발레를 못할 때부터 저를 봐주셨던 분이에요. 그럼에도 저에게 어떤 가능성을 보셨는지, 리허설도 많이 시켜주셨고 좋은 역할도 많이 맡겨주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발레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뉴욕을 매료할 다음 무대
한국에서 정교한 러시아 바가노바 스타일을 몸에 익힌 박선미. 2021년 미국으로 건너와 ABT 스튜디오 컴퍼니에 입단한 뒤 그의 예술세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갔다. 미국의 재즈와 조지 발란신의 현대적 작품들은 낯설기보다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과거 그녀를 짓눌렀던 틀을 깨고 춤 자체를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정점은 작품을 대하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방식에서 드러난다. 박선미는 완벽한 테크닉을 몸에 완전히 익혀 무의식의 영역으로 보낸 뒤에야 비로소 인물의 서사를 덧입힌다. '라이크 워터 포 초콜릿(Like Water for Chocolate)'을 준비할 때는 원작 소설을 읽으며 인물의 고통과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가장 두려워했던 '백조의 호수'조차 날갯짓 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마침내 가장 보석같은 레퍼토리로 바꿔 놓았다.
ABT '돈키호테' 무대에서 박선미. ⓒNir Arieli, courtesy of American Ballet Theatre.
박선미는 무대 뒤에서 공연 직전까지 손이 떨릴 정도로 지독한 긴장과 싸운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막이 오르고 조명이 비추는 순간 거짓말처럼 객석의 소음은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간이 열린다.
"캐릭터에 몰입하면 관객은 안 보여요. 파트너와 무대 위 사람들만 눈에 들어오죠. 그때부턴 정말 무대를 즐길 수 있게 돼요."
다음 가을 시즌부터 수석무용수로 무대에 서지만 달라질 건 없다는 게 그의 담담한 고백이다. "그저 관객들이 '선미는 정말 무대를 즐기는 무용수구나'라고 느껴주시면 좋겠어요. 언젠가 모두가 기억하는 발레리나로 남는게 발레 인생 최대 희망이지만, 지금은 무대 위에서 빛나는 무용수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박선미는 다음달 21일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립 30주년 기념 공연 '리: 무브 에라(RE: MOVE ERA)'에 출연해 국립극장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