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국내에 붙잡는 힘은 애국심이 아니라 자본시장과 인재 등 투자환경의 경쟁력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SK하이닉스의 나스닥 상장에 맞춰 내놓은 발언은 자축이 아니라 경고에 가깝다.

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ADR)는 상장 첫날 공모가 대비 13% 급등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최 회장이 강조한 대목은 ‘대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전력과 용수, 인력, 부지, 공급망 여건이 갖춰진다면 미국 내 생산공장 추가 건설도 가능하다”며 “과거보다 투자 속도를 10배는 빨리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패권 전쟁은 누가 더 빨리 생산능력을 늘리느냐의 속도전으로 국면이 바뀌었다. 미국 정부와 빅테크 고객사도 현지 생산을 압박하고 있다. 물론 SK는 이번에 조달한 자금 40조원을 국내 팹 건설에 우선 투입한다는 계획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인프라 확보가 제때 이뤄지지 않는다면 미국 투자의 상대적 매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가 용인 첫 번째 팹 가동을 2029년으로 앞당기겠다고 밝혔지만 토지 보상과 인허가, 발전소·송전망 구축, 용수 확보가 늦어지면 계획은 공염불이 된다.

더 뼈아픈 대목은 인재 문제다. 최 회장은 “한국 주식을 기초로 한 스톡옵션만으로는 글로벌 인재에게 매력이 크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낮은 기업가치와 제한적인 주식 보상 체계로는 엔비디아 등 빅테크와 인재 경쟁을 벌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자본시장의 저평가를 넘어 기술 경쟁력까지 약화시키는 족쇄가 된 것이다. 반도체특별법의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를 거부한 더불어민주당도 메가 프로젝트와 관련해 첨단산업 연구 인력의 주 52시간 근로제 완화를 논의하기로 했다. 공론화 수준을 벗어나 획일적인 노동규제는 당장 손봐야 한다.

최 회장 발언은 기업의 냉정하지만 당연한 투자 생리를 보여준다. 동시에 한국이 가장 빠르게 공장을 짓고, 글로벌 인재가 일하고 싶어 하며, 기업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국가인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더 이상 총수의 결단과 애국심에만 기대서 기업을 안방에 주저앉혀 둘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