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미국 자본시장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세계 최대 금융시장인 뉴욕증시에서 265억700만달러(약 40조원)에 달하는 역대급 자금을 조달하는 데 성공했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제조사를 넘어 대표적인 글로벌 인공지능(AI) 기업으로서 몸값을 제대로 인정받았다.
美서 가장 '핫한 기업' 됐다…하이닉스, TSMC와 어깨 나란히
시장이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공모가다. 기업들은 대규모 주식을 새로 찍어낼 때 신규 투자자를 모으기 위해 기존 주가보다 가격을 할인해주는 게 관례다. 주식 수가 늘어나는 데 따른 주가 하락 부담을 덜기 위해서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이 공식마저 깼다. 상장 직전 한국 증시 종가(9일 기준 218만6000원)를 미국 주식 기준(10분의 1)으로 환산한 가격보다 오히려 2.9% 더 비싼 주당 149달러에 공모가를 확정했다. 기존 주가에 웃돈을 얹어 발행하는 ‘프리미엄 프라이싱’을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 사상 최초로 해낸 것이다. 전 세계 큰손이 SK하이닉스의 독보적 기술력과 미래 가치를 보고 통 큰 베팅에 나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TSMC처럼 ADR에 쏠릴 수도

SK하이닉스는 10일 뉴욕 타임스스퀘어 나스닥 마켓사이트에서 ADR 상장 기념식을 열고 거래를 시작했다. 이 자리엔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그룹 경영진이 총출동해 개장 벨을 울렸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기술 리더십을 증명하며 AI가 있는 모든 곳에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행한 물량은 SK하이닉스 전체 주식의 2.5%인 미국예탁주식(ADS) 1억7790만 주다. 규모로 보면 미국 증시 역대 기업공개(IPO) 사례 중 지난달 상장한 스페이스X(857억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미국에 상장한 외국 기업 중에선 2014년 중국 알리바바(250억달러) 기록을 12년 만에 깨고 1위에 올랐다.

시장에선 글로벌 큰손이 대거 몰리며 미국 시장 주가가 한국 시장보다 비싸지는 ‘역(逆)김치 프리미엄’이 생길지 주목하고 있다. 공모가(149달러) 자체가 한국 보통주 주가(10분의 1 환산 기준)보다 2.9% 높게 책정돼 이 같은 흐름이 예고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1997년 미국에 상장한 대만 TSMC의 ADS가 대만 본토 주가보다 16% 가까이 높은 프리미엄에 거래된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SK하이닉스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신고서를 보면 SK하이닉스는 두 주식 간 가격 차이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 주식을 미국 주식으로 바꾸는 양을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했다.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싼 주식을 산 뒤 미국에서 비싸게 팔아 이득을 챙기는 무위험 차익 거래가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의미다. 상장 초기에는 한국과 미국 주가 간 비정상적인 괴리가 나타날 것이란 관측도 있다. UBS 등은 “미국 주식은 사고 한국 주식은 공매도(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전략이 정석”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글로벌 AI 기업으로 도약

SK하이닉스는 이번 상장을 계기로 글로벌 AI 기업 도약과 AI 반도체 패권 강화에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 마이크론보다 주가수익비율(PER)이 낮게 평가받아 왔으나 최근 압도적인 실적을 바탕으로 ‘저평가 잔혹사’를 끝내고 몸값을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이 지난 3월 GTC 현장에서 ADR 상장에 대해 “미국과 글로벌 주주에게 노출돼 더 세계적인 회사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듯 이번 상장은 엔비디아, TSMC 등 글로벌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확보한 자금은 AI 반도체 주도권 경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한 설비 투자에 집중 투입된다.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 건설, 충북 청주 P&T7 첨단 패키징 팹 구축 등 국내 핵심 생산기지 투자에 활용될 예정이다.

김채연/강해령 기자/뉴욕=박신영 특파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