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하원 아시아태평양코커스(CAPAC) 의원연맹 의장을 맡고 있는 그레이스 멩 의원(가운데)이 30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의회의사당 앞에서 출생시민권을 유지한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AP
미 하원 아시아태평양코커스(CAPAC) 의원연맹 의장을 맡고 있는 그레이스 멩 의원(가운데)이 30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의회의사당 앞에서 출생시민권을 유지한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AP
미국 연방대법원이 미국 땅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출생 시민권 제도를 현재대로 유지하기로 30일(현지시간) 결정했다.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난해 1월 행정명령이 헌법에 반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그러나 대통령이 주요 독립기관의 위원을 해임할 수 있는 권리를 전보다 훨씬 폭넓게 인정하고, 트랜스젠더 운동선수가 경기에 참가하는 것을 제한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속지주의 원칙 확인

미 연방대법원은 지난달 29일부터 이틀간 9건의 핵심 쟁점에 대해 판결했다. 7~8월 두 달간의 휴정기간을 앞두고 밀린 숙제를 처리하듯이 판결을 쏟아냈다.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6대 3으로 출생시민권에 관한 속지주의 원칙을 재확인한 판결이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월 취임 직후 내린 행정명령이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한 모든 사람은 부모의 출신이나 사회적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모두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는다는 수정헌법 14조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정헌법 14조가 “이 땅(미국)에서 자유롭게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정치공동체에 자유롭게 참여할 시민권을 확대하기로 약속한 것”이라면서 “우리는 오늘 그 약속을 지킨다”고 말했다.

진보 성향 대법관 3명과 로버츠 대법원장,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 브렛 캐버노 대법관이 합헌 판단을 지지했다. 캐버노 대법관은 행정명령 무효화의 근거에 대해 이견을 제기했으나 큰 틀에서는 속지주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변론 과정에서 재판정에 직접 출두하는 등 정체성 전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 온 트럼프 대통령에 제동을 건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의회 입법으로 출생시민권 제도를 사실상 무효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미 이 문제에 관한 판단을 내린 상황에서 이 의제가 상원에서 60표를 확보해 신규 입법에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미 하원의 3대 소수계 의원 모임(트라이코커스) 의장단인 그레이스 멩 아시아태평양계 의원 모임(CAPAC) 의장, 이벳 클라크 흑인 의원 모임(CBC) 의장, 아드리아노 에스파이야트 히스패닉 의원 모임(CHC) 의장은 이날 워싱턴DC 의회의사당(캐피톨힐) 앞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늘의 판결은 그가 헌법을 무시하거나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단지 서명 한 번으로 박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고 했다.

◆중간선거서 공화당 유리해져

반면 다른 판결들은 미국 사회 전반이 보수화되는 경향을 반영한 것이 적지 않았다. 트랜스젠더 운동선수에 관한 판결은 그동안 민주당을 위시한 진보진영의 의제가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대법원은 웨스트버지니아주와 아이다호주가 트랜스젠더 여성 운동선수가 여성 스포츠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여성 농구코치로 오래 활동한 캐버노 대법관은 트랜스젠더 선수의 출전을 허용하는 것이 “여성 선수를 대체하거나, 불리하게 만든다”면서 “스포츠의 냉혹한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독립기관 위원에 대한 해임권한이 대폭 확대된 것도 이런 기류를 반영하고 있다. 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거래위원회(FTC)의 민주당 소속 위원인 레베카 켈리 슬로터를 해임한 건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이는 91년 전 판례를 뒤집은 것으로, FTC와 유사한 20여개 독립기관에 대한 행정부의 영향력을 크게 강화한 것이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판결도 여럿 나왔다. 공화당은 선거일 이후 5영업일 내 도착한 우편투표를 인정하는 미시시피주의 법이 위헌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배럿 대법관이 진보파에 가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판결 중에는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앨라배마주의 선거구 획정에 관한 판결은 하급심에서 인종차별적이라고 판단된 선거구 획정 지도를 올해 선거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대법원은 지난 4월 루이지애나주의 소수인종 전용 선거구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 이어 소수인종의 투표권 보호에 관해 보수적인 판단을 이어가고 있다.

대법원은 또 연방선거운동 과정에서 자금 이용 제약을 사실상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선거 후보자가 특정인에게 최대 7000달러까지만 후원을 받을 수 있다. 정당 차원에서 모금을 할 수 있지만 이를 사용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이런 제도는 거액 기부자가 많은 공화당보다 소액 후원자가 많은 민주당에 더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대법원은 이같은 제약이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수정헌법 1조에 어긋난다고 봤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판결이 공화당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시기"에 나왔다면서 "공화당 당 위원회는 자금이 풍부하고 그 돈을 중간선거 경합지에 즉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