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이 섬에선 과거가 사라지지 않는다 [박은새의 유별난 브랜딩]
수많은 침략 속 쌓은 역사
주도(州都)인 팔레르모는 제주도의 14배 크기에 달하는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의 심장이다. 중심 거리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괴테가 왜 "거리를 대충 파악하는 것은 쉬우나, 완전히 정통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라고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차들은 신호를 무시한 채 과속으로 달리고, 슬럼화된 복잡한 구시가지 곳곳에 빨래가 펄럭인다. 번잡함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 메인 도로 4개가 만나는 사거리, '콰트로 칸티'가 나타난다. 영화, 드라마 배경으로 접했던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나타나자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인파를 따라 조금 더 걸으니 마시모 극장(테아트로 마시모)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대부 3>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기도 이곳은 그리스 코린트식 기둥으로 세워진 웅장한 외관이 압도적이다. 세월의 때가 탄 빛바랜 표면에 잠시 아쉬움이 스치다가도, 주변의 이국적인 야자수와 어우러진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대로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파리, 비엔나(빈) 오페라 하우스 다음으로 유럽에서 셋째로 큰 오페라 극장이다. 비록 시즌이 맞지 않아 공연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극장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아쉬움은 경탄으로 바뀐다. 고개를 들면 붉은빛과 금빛으로 찬란한 천장, 그리고 벽화 <음악의 승리>가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벽면을 장식한 무라노 유리 샹들리에는 객석마저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탈바꿈시킨다. 절정의 기교가 필요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중 '카스타 디바(Casta Diva)'가 이 공간에 울려 퍼진다면 어떨까. 호흡이 긴 우아한 선율에 순간 숨이 멎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에 잠기게 된다.
비와 흐린 날씨는 이 오랜 돌들에 묵직한 기운을 더한다. 석양을 뒤로하고 다홍빛 조명이 켜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는 신전 안에서 그리스 신들의 이야기가 생생한 연극으로 펼쳐지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공간에 놓인 접시만 봐도 레스토랑을 관통하는 감각이 어느 정도 읽힌다. 여느 파인 다이닝처럼 접객을 하는 매니저가 없음에도 요리가 기대됐던 이유다. 메뉴판도 문학적이다. 고등어 직화에 성게와 푸아그라를 올린 ‘노인과 바다’, 라이스페이퍼 위의 ‘천사의 달걀’. 팔레르모에서 농도 짙은 파스타와 통조림 같은 해산물에 실망했었던 터라, 이 내륙의 상큼하고 섬세한 뉘앙스가 더욱 반갑게 다가온다.
그 덕에 생생한 사냥 같은 일상 장면부터 신화, 기하학 무늬 등이 대리석 조각으로 완벽하게 표현돼 있다. 특히 비키니 스타일의 운동복을 입고 공을 던지는 여성들을 그린 ‘비키니 소녀들’이 유명한데, 그림 속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이 오늘날 우리의 얼굴과 묘하게 닮아 낯설지 않다. 바닥에 거대한 그림책처럼 펼쳐진 대리석 조각들을 따라가다 보니, 2000년 전 그들의 활기찬 일상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문득 어린 시절 색종이를 뜯어 모자이크 숙제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특히 잡지 사진을 활용할 때면, 원래의 이미지가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찢기고 다시 새로운 패턴으로 결합하며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무척 신기했었다. 고작 종이를 뜯어 붙이는 데도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는데, 이 광활한 대저택의 바닥을 대리석 조각으로 메운 장인들의 고된 노동을 생각하니 괜히 어깨가 결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장인들이 고통스럽게 새겨 넣은 그 대리석 이야기 덕분에, 우리는 2000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뛰어넘어 그들과 조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