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 사진=뉴스1
대법원. / 사진=뉴스1
성폭행 사건 발생 2년여 뒤 제출된 DNA 증거를 근거로 유죄를 인정하려면 증거의 보관·제출 과정에 조작이나 훼손 가능성이 없었는지 엄격히 따져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1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대법원 1부는 최근 강간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21년 8월 자신의 차량에서 B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무죄로 판단했다. A씨가 B씨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로 폭행해 간음했다는 점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항소심에서는 결론이 바뀌었다. 피해자가 사건 당시 입었다고 한 바지에 대한 DNA 감정이 이뤄졌고, 그 결과 A씨의 DNA가 검출됐다.

2심은 이 감정 결과를 유죄 판단의 주요 근거로 삼았다. 바지 일부가 손상된 점도 피해자가 방어하는 과정에서 생겼다는 B씨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DNA 증거의 증명력을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문제의 바지는 사건이 발생한 지 2년 이상 지난 2024년 1월 수사기관에 제출됐다. 그런데 피해자가 그동안 바지를 어떤 상태로 보관했는지, 왜 뒤늦게 제출했는지에 대해 수사기관 조사나 항소심 심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지에서 A씨와 B씨 외에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DNA가 함께 나온 점도 대법원이 문제로 본 대목이다. 대법원은 이런 사정이 있는 만큼 바지의 훼손 가능성을 쉽게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 "과학적 증거도 맹신해선 안 돼"

대법원은 과학적 증거라고 해도 전제가 되는 사실과 분석 과정이 모두 검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과학적 증거방법은 전제로 하는 사실이 모두 진실임이 입증되고 추론 방법이 과학적으로 정당해 오류의 가능성이 전혀 없거나 무시할 정도로 극소한 경우로 인정돼야만 사실인정에 상당한 정도로 구속력을 갖는다"고 밝혔다.

이어 검사가 바지의 보관·제출 과정과 채취·보관·분석 등 전 과정에서 자료의 동일성이 인정된다는 점을 추가로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조작·훼손·첨가가 없었다는 점도 담보돼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항소심 법원도 이를 토대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다시 심리·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법원은 해당 증거가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유일하거나 유력한 증거일수록 검증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특히 그 증거방법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유일하거나 유력한 증거일수록 자칫 그 과학성에 대한 맹목적 신뢰로 인해 형사소송의 요체인 엄격한 증명을 요하는 증명법칙이 훼손될 수 있으므로 더욱 그렇다"고 했다.

항소심이 1심의 무죄 판단을 뒤집을 때 적용해야 할 기준도 함께 제시했다.

대법원은 1심의 증거가치 판단이 명백히 잘못됐거나, 그 논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한 경우, 또는 항소심 심리 과정에서 심증 형성에 영향을 줄 만한 객관적 사유가 새로 드러난 경우에 한해 1심 판단을 뒤집을 수 있다고 밝혔다.

파기환송심에서는 바지가 제출되기까지의 보관 경위와 DNA 감정 결과의 증명력,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다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