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어떻게 키웠는데"…'천재 아버지' 둔 평범한 아들의 비극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18세기 프랑스 정물화 거장
장 시메옹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
장 시메옹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
먼 곳에서 날아든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고개를 떨궜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화가였습니다. 유럽의 왕과 여왕들이 앞다퉈 그의 그림을 사들였습니다. 이런 그에게도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은 화가들의 ‘최상위 리그’에 들어가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못다 이룬 꿈을 하나뿐인 아들에게 걸었습니다. 최고의 스승에게 교육을 맡겼고, 유학도 보내 줬습니다. 자신이 닿지 못한 경지에 아들이 오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 탓이었을까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어느샌가 연락도 끊겼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아버지에게 들려온 소식은, 아들의 부고였습니다.
대체 이 부자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꿈이란 대체 뭐길래 가족의 운명을 갈라놨을까요. 18세기 프랑스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정물화의 거장, 장 시메옹 샤르댕(1699~1779)과 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연보다 빛나는 '명품 조연'
샤르댕이 원했던 그 꿈, 화가들의 '최상위 리그'가 뭔지부터 보겠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화가들은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습니다. 신과 영웅, 역사의 명장면을 담은 '역사화'를 그리는 화가가 최상위, 그러니까 주연이었지요. 그 아래로 초상화, 풍경화, 일상을 그린 풍속화가 차례로 이어졌습니다. 과일이나 그릇, 동물을 그리는 화가는 맨 밑바닥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림 종류에 따라 주연과 단역이 나뉘었던 셈입니다.그렇다면 모두가 역사화를 그리면 되지 않을까 싶겠지요. 하지만 역사화가가 되려면 그림 솜씨만으론 부족했습니다. 먼저 신화와 성경, 고전을 줄줄 꿰는 교양이 있어야 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며 자라야 갖출 수 있는 것이었지요. 여기에 더해 엘리트 화가 교육기관인 왕립 아카데미에서 체계적으로 인체 데생을 배워야 했는데, 이 학교에 들어가려면 아카데미 화가의 추천, 즉 '연줄'이 필요했습니다. 한마디로 평범한 집안 출신은 역사화가를 넘보기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고전 회화와 거장들의 그림 공식을 배울 길이 없던 청년은 눈앞의 사물을 무섭게 파고들었습니다. 스물아홉 살이던 1728년, 그는 가오리 그림 한 점으로 왕립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실력이 워낙 탁월했던 덕분에 샤르댕은 단번에 아카데미 회원에 합격했습니다. 다만 등급은 '동물과 과일에 능한 화가'. 배우 합격증에 '단역 전문'이라고 적혀 나온 셈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미술의 주인공은 화려함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프랑수아 부셰의 그림이었습니다. 분홍빛 비너스, 통통한 큐피드, 비단과 진주가 넘실대는 화려한 세계. 그 옆에 샤르댕은 부엌 식탁과 물 항아리 그림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화려한 주연 대신 단역의 그림 앞에 점점 더 오래 서 있게 됐습니다.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샤르댕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쉬운 마음이 짙게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역사화를 그리는 화가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어린 시절 역사화를 그리기 위한 훈련을 받지 못했던 그는, 역사화가라는 '화려한 주연'의 자리를 언제나 부러워했습니다.
그림 속의 즐거운 집
화가로서는 잘 풀렸지만, 샤르댕의 개인적인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샤르댕은 1731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결혼해 그해 아들을, 2년 뒤에는 딸을 얻었습니다. 행복은 짧았습니다. 결혼 4년 만에 아내가 병으로 숨을 거뒀고, 얼마 안 돼 어린 딸이 어머니를 따라가듯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샤르댕은 충격을 받아 한동안 붓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붓을 들어 그리기 시작한 건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샤르댕은 아이가 있는 그림이나 가정 생활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정물화를 그리던 샤르댕이 인물화와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한 이유로는 여러 설이 제기됩니다. 먼저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정물화는 값을 비싸게 받기 어려웠는데, 마침 일상을 그린 풍속화의 인기가 올라가던 참이었습니다. 풍속화를 판화로 만들어 대량 생산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친구인 초상화가가 "사람 그리는 일이 자네가 소시지를 그리는 것만큼 쉬운 줄 아나"라고 놀리자 샤르댕의 열등감이 폭발해서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인물화를 그린 이유가 무엇이었든, 샤르댕의 풍속화는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의 풍속화는 떠들썩한 사건이나 화려한 장치가 없어도 자꾸만 눈이 가는 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란한 가정의 순간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고요함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건 샤르댕이 잃어버린 가정에 대한 그리움이 작품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아들은 일찍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건, 어쩌면 그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어긋난 기대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자신이 받지 못한 왕립 아카데미의 정식 미술 교육을 받게 했고, 최고의 화가들을 선생님으로 붙여 줬습니다. 목표는 아들을 최고의 역사화가로 키우는 것. 자신이 평생 받지 못한 '주연'의 영광을 아들이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1754년 스물세 살의 아들은 '로마상'을 받습니다. 일 년에 단 한 명 뽑아 로마로 국비 유학을 보내 주는, 당시 프랑스의 젊은 화가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로마로 떠났습니다. "그래, 내가 못 간 길을 너는 가거라." 샤르댕의 꿈은 현실이 되는 듯했습니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실력입니다. 로마상을 받는 영예를 누렸지만, 아들의 재능과 실력은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백'을 써서 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적지 않았으니까요. 아버지는 아들이 천재라 철석같이 믿었지만, 아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실력과 한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비롯한 '진짜 천재'들의 그림, 그리고 어릴때부터 계속된 과도한 기대에 짓눌려 버렸습니다.
결국 아들은 로마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파리에 돌아왔습니다. 샤르댕과 아들의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필요한 건 다 해줬는데 너는 대체 왜 이 모양이냐. 나 때는 말이다, 아카데미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너 때문에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아마도 샤르댕은 아들을 이렇게 비난했을 겁니다. 샤르댕은 아카데미에서 공개적으로 이런 연설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실패한 화가는 굶어 죽거나, 가난한 막일로 연명해야 합니다. 제 동료 화가의 아들은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군대에서 북을 치는 일이나 하고 있답니다."
멀어가는 눈으로 그린 자화상
아들이 떠난 뒤 샤르댕의 커리어도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작품 유행이 바뀌었습니다. 신화와 역사를 주제로 엄숙한 그림을 그리는 신고전주의가 대세로 떠오르면서, 인물화와 정물화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샤르댕의 그림은 어느새 한물간 옛날 그림 취급을 받았습니다.건강도 무너졌습니다. 평생 만져 온 납 성분 물감 탓에 눈이 망가진 겁니다. 이 무렵 샤르댕은 왕실 미술 책임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병 때문에 더는 유화를 그릴 수 없어서 파스텔에 의지하게 됐습니다." 건강 악화에는 아들을 잃은 정신적 충격도 한몫했을 겁니다.
아내도, 두 딸도, 아들도 모두 떠나, 그릴 수 있는 가족이 자신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이런 상황에서 샤르댕이 그린 건 자신의 얼굴이었습니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눈으로 샤르댕은 파스텔을 쥐고 자기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평생 '단역'으로 불리던 화가는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기 자신을 그림의 주인공 자리에 세웠습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파스텔 자화상은 열세 점에 달합니다.
뒤바뀐 등급표
샤르댕의 이름이 다시 살아난 건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1860년대 비평가 공쿠르 형제가 샤르댕을 재발굴했고, 루브르 박물관이 처음으로 그의 그림을 사들였습니다. 마네는 샤르댕의 대표작 '비눗방울'을 자기 방식으로 다시 그렸고(1867년), 세잔은 샤르댕에게 영감을 받아 정물화를 그렸습니다. 미술학도 시절의 앙리 마티스는 루브르에서 샤르댕의 작품을 베끼며 그림을 배웠습니다.
부엌과 식탁과 물 단지를 그린 그림들 앞에서 프루스트는 말합니다. “샤르댕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배 한 알이 여인만큼 생생하고, 부엌의 단지가 보석만큼 아름답다는 것을. 그는 만물이 그것을 아름답게 비추는 빛 아래서, 그것을 응시하는 정신에게 신성하게 평등하다고 선언했다. 그는 우리를 거짓 이상주의에서 끌어내, 사방에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드넓은 현실로, 아름다움의 망망대해로 띄워 보냈다.” 쉽게 말해 아름다움은 대상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에세이는 훗날 문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핵심 아이디어를 담고 있습니다.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한입 베어물면서, 과거의 기억에 빠져들어 삶을 되돌아본 뒤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가는 그 줄거리의 씨앗은, 평범한 일상과 물건의 아름다움을 조명한 샤르댕의 그림 앞에서 싹튼 것이었습니다.
샤르댕이 살았던 시대의 화가 등급표처럼, 살다 보면 우리는 대학·직업·직장 등 여러 등급표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런 구분이 무의미한 건 아닙니다. 실제로 등급표는 삶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때가 많습니다. 더 '높은 등급'을 받으려는 노력은 발전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등급표에 적힌 서열은 생각보다 쉽게, 빠르게 뒤바뀝니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의 서열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샤르댕의 그림과 삶은 보여줍니다.
*이번 기사는 루브르 박물관·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품 해설, Chardin (Paul G. Konody 지음), Salons (Denis Diderot 지음), Chardin and Rembrandt (Marcel Proust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지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 <인상주의를 넘어: 디트로이트 미술 걸작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책 시리즈 완결편 <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 표지작(피카소의 책 읽는 소녀)을 비롯해 시리즈에서 다룬 여러 거장들의 명작들을 실제로 볼 기회입니다. 한국경제신문사 인스타그램(@hankyung_bp)과 기자 인스타그램(@syoung_art)에서 관련 이벤트가 진행 중이니 놓치지 마세요.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