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막을 올린 국립무용단의 '몽유도원무'는 제목처럼 꿈속의 이상향을 향한 여정이지만, 그 출발점은 오히려 현실의 무게에 닿아 있다. 안무가 차진엽이 이번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제시한 '굽이굽이'는 무대 위에서 인간의 삶과 자연의 움직임,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유려한 흐름으로 구현된다. 60분간 이어지는 작품은 고단한 현실의 풍경을 그린 1막과 꿈속의 이상향을 펼쳐낸 2막으로 선명하게 나뉜다.
현실의 격랑 너머로 황홀경이 피었다, 무용 '몽유도원무'
공연의 시작은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흑백의 무대 위, 얇은 가로막 뒤에 숨은 무용수들이 무릎으로 바닥을 쓸며 좌우로 움직인다. 이들은 때로 바다 위의 섬이, 들판의 낮은 구릉이, 혹은 험준한 산맥이 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익숙하고도 깊은 풍경이다.

몸과 몸이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지리적 풍경은 살아 움직이는 자연 그 자체다. 그 앞을 봇짐 진 사내가 힘겹게 지나가는 장면은 인간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미디어 아트의 활용이 인상적이다. 수묵의 번짐은 배경음악인 엠비언트 사운드의 파동처럼 퍼져나가고, 픽셀이 거칠게 드러나는 어두운 산세는 무용수들을 삼킬 듯한 성난 파도로 변모한다. 거친 픽셀들이 무용수들의 얼굴과 몸 위로 투영되는 순간은 마치 파도가 흩뿌리고 간 포말처럼 다가온다. 신체의 움직임이 결국 우리를 덮쳐오는 격랑의 세월이었음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연출이다.
현실의 격랑 너머로 황홀경이 피었다, 무용 '몽유도원무'
2막에 접어들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흑백의 수묵화가 걷힌 자리에 푸른빛과 보랏빛, 핑크빛이 감도는 무대가 등장한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봤다던 도원을, 화가 안견이 동시대적으로 해석한다면 바로 이런 풍경일 것이다.

1막의 무용수들이 날것의 인간이었다면, 2막의 이들은 풀잎과 곤충 등 생동하는 만물을 품은 존재로 화합한다. 상추 이파리같은 연둣빛 옷을 입은 남성 무용수들 사이로 꽃잎 같은 여성 무용수가 유려한 몸짓을 선보일 때, 무대는 시각적 황홀경과 함께 생명의 약동으로 가득 찬다. 관객들 역시 이 환상적인 에너지가 만드는 소용돌이에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간다.

공연 후반부, 꿈은 다시 현실로 회귀한다. 화려한 색채를 입었던 무용수들은 다시 한데 모여 무릎으로 바닥을 쓸어내듯 움직인다. 그 앞으로 다시 얇은 막이 드리워지면, 무대는 어느새 1막에서 보았던 굽이굽이 이어진 산세의 풍경으로 돌아간다.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진다는 암시로 읽힌다.
현실의 격랑 너머로 황홀경이 피었다, 무용 '몽유도원무'
현대무용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차진엽과 국립무용단의 만남은 이제 낯설지 않다. 이번 작품에서 주목할 지점은 두 장르의 이질성이 아니라, 전통이 동시대성과 어떻게 접점을 찾는가에 있다. 안무가가 제안한 현대무용의 움직임을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은 자신들만의 한국춤 어법으로 체화해 내고, 그 과정에서 장르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진다.

특히 2022년 초연 이후 2024년을 지나 올해 3연에 이르기까지, 차진엽은 무용수들의 현재 상태와 삶의 이야기를 다시 고고하게 녹여내며 작품을 다듬었다. 박혜지의 2막 솔로 장면과 일부 2인무 구조, 음악 구성의 변화는 이러한 고민의 결과다. 새로운 무용수들의 몸이 지닌 언어가 더해지면서 무대 위에는 초연 당시보다 한층 더 개별적인 호흡과 생명력이 깃들었다.

'몽유도원무'는 이상향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작품이 비추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전통의 동시대성을 집요하게 고민하는 국립무용단의 실험은 그렇게 관객들에게 울림 있는 현재진행형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