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브랜드의 운명을 바꾼 천재 디자이너들 [이윤정의 인사이드&비하인드]
브랜드와 디자이너, 현명한 상생
디자이너의 이름이 곧 브랜드였던 시기도 있었다. 샤넬, 크리스챤 디올, 지방시, 입생로랑, 겐조, 발렌티노, 돌체앤가바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비비안 웨스트우드, 헬무트 랭, 랄프 로렌, 도나 카란, 캘빈 클라인 등. 여전히 디자이너가 브랜드인 곳도 있고, 시대의 흐름을 타고 새로운 디자이너와 협업하며 브랜드를 이끄는 곳도 많다.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동일한 곳의 장점은 컨셉과 아이덴티티의 일관성이다. 창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똑같다’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적어도 ‘소비자가 변심할 정도의 변화는 없었다’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그렇지만 역사가 오래될수록 한 명의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이끌기가 어렵다. 정체성은 유지하되 적절하게 시대의 흐름을 가미하는 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브랜드는 새로운 디자이너의 영입으로 돌파구를 찾곤 한다.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이러한 노력이 극강의 시너지를 발휘한 경우도 적지 않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구찌를 이끈 톰 포드는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에 섹시함을 더하여 구찌를 초고속 성장시켰다. 1994년에 약 2억 달러였던 구찌의 매출은 2000년대 초 30억 달러에 육박했다. 톰 포드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클래식에서 섹슈얼리티, 글래머, 파워 등으로 재정의했다. 비슷한 시기에 디올과 존 갈리아노의 협업도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우아한 디올을 과감하고 아방가르드한 스타일로 변화시켰고, 그가 소개한 ‘새들백’은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직도 아이코닉한 액세서리로 회자되고 있다. 스타성이 풍부한 디자이너가 브랜드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어넣은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의상뿐 아니라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제품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안했다. 스티븐 스프라우스, 무라카미 다카시, 쿠사마 야요이와의 협업은 럭셔리 브랜드와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격상시킨 사건이었다. 마크 제이콥스처럼 브랜드의 정체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안한 디자이너로 에디 슬리먼과 피비 필로를 빼놓을 수 없다. 에디 슬리먼은 브랜드 이름인 ‘입생로랑’을 ‘생로랑’으로 바꾸는 파격을 시도하고 컬렉션에 슬림함과 록 시크를 첨가했다. 요즘 대세인 ‘조용한 럭셔리’의 시초 격인 셀린과 피비 필로의 시너지도 패션계를 뒤흔든 긍정적인 조합이었다. 이들은 혁신적인 제안으로 브랜드에 변화를 주도하면서도 브랜드의 근간을 존중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연한 흐름이지만 의기투합했다고 매 순간 결과가 좋을 수는 없다. 브랜드와 디자이너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환희와 실망을 공유한다. 구찌와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이별, 버버리와 리카르도 티시의 결별은 브랜드와 고객 모두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맥시멀리즘은 구찌와의 관계에서 분명한 장점이었다. 미켈레만이 가능한 컬러와 스타일의 조합은 감히 흉내 낼 수 없었다.
구찌의 성공과 부침을 함께 경험한 이후 발렌티노에 합류한 미켈레와 그의 후임으로 구찌에 합류한 뎀나 바잘리아의 행보를 주시하는 것도 두 브랜드와 탁월한 디자이너를 향한 사람들의 지속적인 애정과 기대 때문이다. 미켈레는 최근 선보인 발렌티노 2026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브랜드의 아카이브인 드레이핑, 엠브로이더리와 시퀸 장식 등에서 영감을 받은 옷을 소개하며 브랜드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했다.
그러나 오래도록 성공적으로 유지하는 브랜드에게는 공통점이 있으니, 갖가지 상황 속에서도 브랜드의 DNA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버버리가 몇 년 전 리카르도 티시를 통해 고유의 헤리티지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치다가 다시 헤리티지를 강조하는 전략으로 바꾼 것에서도 알 수 있다. DNA는 흔히 브랜드의 뿌리라고 불린다. 뿌리가 단단히 지탱하지 못하면 걸출한 디자이너도 고유의 매력을 꽃피우기 어렵다. 그렇기에 정체성과 창의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하는 디자이너가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균형의 추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소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