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조카 켄 하쿠타(오른쪽)가 존 호프만 백남준 에스테이트 큐레이터와 함께 백남준의 '미디어 샌드위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남준의 조카 켄 하쿠타(오른쪽)가 존 호프만 백남준 에스테이트 큐레이터와 함께 백남준의 '미디어 샌드위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남준 에스테이트(유산 관리 재단)에 있는 작품 중 딱 한 점만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이 작품을 선택하겠습니다.”

백남준(1932~2006)의 장조카이자 유산 관리자인 켄 하쿠타(75)는 지난 1일 ‘미디어 샌드위치’(1961~1964)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이 작품은 한국과 일본의 레코드판 8장과 독일의 전자공학 잡지 8권, 19세기 인쇄물 하나를 나란히 배치한 백남준의 초기작이다.

레코드판(소리)과 잡지(전자 기술), 인쇄물(시각 이미지)을 결합한 이 작품을 통해 백남준은 미디어아트라는 장르의 서막을 올렸다. 존 호프만 큐레이터는 “백남준이 작곡가를 그만두고 미디어아트를 막 시작했을 때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백남준의 20주기 회고전 ‘백남준: 되감기/되풀이(Rewind/Repeat)’가 지금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1층 전시공간 ‘APMA’에서 열리고 있다. 세계 최대 화랑 가고시안과 백남준 에스테이트가 함께 마련한 전시다. 백남준 에스테이트 큐레이터이자 백남준의 생전 동료였던 존 호프만이 기획을 맡았는데, 에스테이트와 공식 협업한 전시가 국내에서 열리는 건 25년 만이다.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 당시 사용했던 작품과 착용 지시서가 나와 있다. 왼쪽은 착용 당시 사진. /가고시안 제공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 당시 사용했던 작품과 착용 지시서가 나와 있다. 왼쪽은 착용 당시 사진. /가고시안 제공
전시장이 넓지 않지만 백남준의 핵심적인 희귀작들을 한눈에 돌아볼 수 있는 밀도 높은 전시다. 출품작 11점 가운데 10점은 국내 최초 공개작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 투명 비닐 브래지어에 소형 흑백 텔레비전 두 대를 내장한 구조로, 당대 유명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이 뉴욕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의 퍼포먼스에서 처음 착용했다. 무어만이 활을 그을 때 발생하는 소리가 TV 화면의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변화시킨다. 기계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숨 쉬듯 움직이는 것이다.

켄은 “기계를 차갑고 기능적인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몸과 감정, 행위에 직접 연결시키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컬러TV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던 50여 년 전에 백남준은 일종의 웨어러블 스마트 기기를 상상한 셈이다. 그는 “이 작품을 발표할 때 나는 열다섯이었는데, 샬럿이 저한테 이걸 입고 벗는 걸 도와달라고 했더니 삼촌이 ‘어떻게 애한테 그런 일을 시키냐’며 화냈던 기억이 있다”며 웃었다.

‘런던과 해외를 위하여(우편함)’(1982)은 영국식 우편함 안에 TV를 넣은 작품이다. 편지 투입구에 해당하는 구멍으로 화면이 보인다. 우편함은 원래 먼 곳의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장치다. 백남준은 그 안에 TV를 집어넣어 편지 대신 전파로 소통하는 시대를 형상화했다.
25년만에 돌아온 백남준 조카…"작품 하나만 남긴다면 이것"
이 작품은 1982년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비디오 아트 전시의 출품작이기도 하다. 켄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시였지만 당시엔 비디오 아트를 수집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며 “백남준은 전시를 마친 뒤 작품을 해체해 부품을 다른 작품에 재활용하곤 했는데, 휘트니미술관 전시에 나갔던 작품 중 딱 세 점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말했다. 우편함이 그 중 하나다.

‘골드 TV 부처’(2005)는 백남준의 대표 연작 ‘TV 부처’ 시리즈의 후기작이다. 금박 입힌 채색 청동 불상이 폐회로 카메라와 모니터 앞에 놓여 있다. 불상은 모니터에 비친 자기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셀카’ 시대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현대인의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골드 TV 부처’(2005). /가고시안 제공
‘골드 TV 부처’(2005). /가고시안 제공
이번 전시 기획의 중심인 켄은 백남준의 큰형 백남일의 장남이다. 사업가이던 그는 자식이 없던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뒤 작품 관리를 맡게 됐다. 켄은 “작고 후 나와 존 호프만 큐레이터 둘이서 방대한 아카이브를 정리하는 데만 거의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 사이 저작권 문제 등으로 국내 미술계와 갈등을 겪으며 10년 넘게 국내와 소통이 단절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켄은 “내가 한국에 없어 소통이 어렵다 보니 여러 오해가 쌓였다”고 했다. 전시는 5월 16일까지. 무료.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