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1884~1967)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갤러리에 걸린 수많은 자화상 가운데 가장 화사하고 건강한 기운이 넘치는 그림이 여기 있다. 한 여성이 화장대 거울 앞에 서서 드러낸 어깨 위로 탐스러운 긴 머리카락을 만진다. 한 손은 머리채를 움켜쥐었고 다른 한 손엔 빗이 들렸다. 빗은 헝클어진 머릿결을 쓸어내린다. 그러느라 상체는 약간 비틀었지만 시선은 거울(관람자)을 정면으로 향한다. 방문, 세면도구와 실내가운 등이 걸린 벽은 (대지가 복사열로 뜨거워지기 전의 자연광으로 꽉 찬 듯) 희고 환하게 배경을 이루고, 이는 그 위에 외출복을 걸치려는 듯한 인물의 가벼운 속옷 차림과 더불어 지금은 일과를 시작하려는 아침 시간이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 거울이 비추는 화장대 위의 기물들(향수병이나 핀, 손수건, 촛대 등)도 반짝이며 아름답지만, 인물의 사려 깊은 눈매나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 결이 내뿜는 생명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1909년 작품으로 <화장대에서>라는 제목이다.
화장대에서 자화상 (1909). / 그림출처. cultureru.ru.
화장대에서 자화상 (1909). / 그림출처. cultureru.ru.
‘은 세기(The Silver Age of Russian Culture)’ 핵심 가문

이 그림의 주인공인 지나이다 예브게니예브나 세레브랴코바(1884~1967)는 회화사에 남은 최초의 러시아 여성 중 한 명이었고,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베누아-란세레 가문을 언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외할아버지 니콜라이 베누아는 건축가(러시아 왕실의 여름 궁전인 ‘페테르고프’의 수석 건축가)였고, 아버지 예브게니 란세레는 조각가였으며(지나이다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예카테리나 니콜라예브나(건축가 니콜라이 베누아의 딸이자 건축가 레온티예프 베누아와 예술가 알렉산드르 베누아의 누이)는 그래픽 아티스트였다. 그리고 발레 ‘뤼스’를 창단하고 이끈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외삼촌 알렉산드르 베누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예술 세계’파의 활동이야말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소위 ‘은 세기’를 이루는 핵심 요소였으니,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가 지닌 유산(알렉산드르 베누아의 언급에 의하면 “손에 연필을 쥐고 태어난”)이 어떠한 것인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 / 사진출처. © sovart-gallery.com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 / 사진출처. © sovart-gallery.com
그녀의 창조적인 삶은 그녀가 살았던 시대, 즉 잔인하고 폭발적인 20세기 전반의 운명에 달려 있었다. 지난 세기 러시아 예술에 대한 더 깊고 공정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되는 21세기의 상황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1930년대 초에 완전히 꺾여버린 러시아 아방가르드 그룹의 기세를 더듬는 과정에서 저쪽 실마리의 끝은 은 세기다. 소모프, 쿠스토디예프, 보리소프-무사토프 등의 이름과 함께 러시아에서 상징주의와 모더니즘의 첫 물결이 189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탄생한 예술 단체인 ‘예술 세계’(동명의 잡지와 전시회가 있었다)를 통해 밀려왔고,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는 이들 중 거의 막내 그룹에 속했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미묘한 서정성과 다정함을 전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나이다는 아버지 예브게니 란세레의 영지인 네스쿠츠노예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며 성장했다. 초상화가 오십 브라즈의 제자였고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1905년엔 사촌(고모의 아들)인 보리스 세레브랴코프와 결혼했다. 지나이다 쪽 베누아-란세레 가문은 프랑스계로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었고, 보리스 쪽 세레브랴코프 가문은 정교회 신자들이었다. 교회는 가까운 친척 간의 결혼을 장려하지 않아 허락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트레차코프 갤러리 세레브랴코바 특별전 중 무희 그림 앞에서 / 사진출처. www.mskagency.ru.
트레차코프 갤러리 세레브랴코바 특별전 중 무희 그림 앞에서 / 사진출처. www.mskagency.ru.
서사시적 유산

1909년 러시아 시즌이 시작되면서 세레브랴코바는 디아길레프의 발레 디자인에 참여했다. 위에서 언급한 <화장대에서>는 1910년 ‘예술 세계’가 연 전시회에서 선보인 후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화가들은 자화상을 작업할 때 전형적인 포즈를 취하고 그에 상응하는 세팅을 한다. 손에 팔레트와 붓을 들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자화상엔 ‘겨울날 아침’이라는 다른 제목도 붙었다. 밤사이 내려 그득 쌓인 눈에 반사된 맑고 부드러운 빛이 느껴진다. 러시아인들은 ‘금 세기’의 대표 시인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대목을 떠올리며 이 그림을 본다. “타티야나는 창문으로 하얗게 눈 덮인 아침의 안뜰을 바라보았다.”

세레브랴코바의 명성은 보통 가족과 친구들을 그린 매력적인 초상화, 그리고 농민을 주제로 한 대형 작품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럼에도 시작은 풍경화와 관련이 있는데, 우선 부모의 영지를 중심으로 한 소러시아의 풍경과 관련이 있다. <녹색의 가을>(1908)은 바로 저 네스쿠츠노예에서 체득한 러시아 땅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예리하게 감각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녹색의 가을> (1908) / 그림출처. aif.ru
<녹색의 가을> (1908) / 그림출처. aif.ru
이렇게 혁명 직전인 1914~17년, 그녀는 러시아 촌락의 모습과 그곳에 거주하는 농민들의 노동과 일상에 집중했다. <잠자는 농민 여인>(1917)과 <캔버스 천 표백>(1917)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농민 여성들의 모습은 낮은 지평선으로 인해 더욱 웅장함을 띠고 있다. 이 시기 또 한 명의 뛰어난 여성 화가 곤차로바가 그린 같은 주제의 그림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민화적 요소를 차용해 강력한 농민을 그린 나탈리아 곤차로바에 비해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의 농민은 고상하고 조화로운 느낌이다.
잠자는 농민 여인 (1917) / 그림출처. muzei-mira.com
잠자는 농민 여인 (1917) / 그림출처. muzei-mira.com
[좌] 나탈리아 곤차로바 <캔버스 천의 표백> (1908) / 그림출처. rusmuseum.ru  [우]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 <캔버스 천 표백> (1917) / 그림출처. muzei-mira.com
[좌] 나탈리아 곤차로바 <캔버스 천의 표백> (1908) / 그림출처. rusmuseum.ru [우]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 <캔버스 천 표백> (1917) / 그림출처. muzei-mira.com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를 동시대 화가들과 구분하게 해주는 특징은 무엇일까? 란세레 가문의 서사시적 유산과 그녀와 밀접하게 소통한 농민들에 대한 기억으로 확인되는 가장 따뜻하고 친근한 감정을 모델들과 연관시켰다는 것, 혁명 이전의 그림 중 도덕적 힘과 건강한 정신에 대한 믿음으로 러시아 여성의 정신적·육체적 아름다움을 표현해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세레브랴코바는 강하고 성숙한 여성을 선택했다. 그들은 신고전주의적 질서와 웅장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예술과 불화한 혁명

‘어린이 초상화’라는 소주제를 풍성하게 채색해 낸 두 점의 그림은 <화장대에서>와 함께 세레브랴코바의 이름을 우리의 뇌리에 깊게 각인시킨다. 먼저 <아침 식사>(1914). 어른(아마도 할머니)의 손이 아이들에게 수프를 나누어 주고 있다. 화면에서 가장 멀리 있는 아이는 아버지를 닮은 금발로, 꿈꾸는 듯 사려 깊은 눈망울을 지녔다. 생생한 표정으로 예술가인 어머니를 돌아보고 있는 아이는 세 살이다. 아이들의 시선 처리가 눈에 띈다. 벽과 가구가 이루는 어두운 배경과 파란색 옷의 색조가 대조를 이룬다. 하얀 식탁보와 아이들의 얼굴이 빛나는 가운데 식탁 위에 놓인 접시 하나하나도 주의 깊게 기록되었다. 소박하게 성실하고 꾸밈없이 맑다. 5년 후에 그려진 <카드로 만든 집>(1919)에도 다양한 색조의 파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남녀 아이들의 얼굴이 빛으로 특히 강조되었다.
<아침 식사> (1914) / 그림출처. vedomosti.ru
<아침 식사> (1914) / 그림출처. vedomosti.ru
그림엔 카드 쌓기를 통해 아이들의 집중력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모양을 갖추어 가는 집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두려움까지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네 아이가 이루는 흥미로운 대형, 막내 아이의 유독 불안한 시선이 카드를 막 쌓고 있는 인물을 향해 있는 강조점 등을 보면 지나이다가 집단 초상화의 주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작가 자신도 이 그림은 상징이 아니라 그저 매우 현실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동화의 한 장면인 양 그려낸 이 삽화적 장면은 바로 그 순전히 일상적인 의미에서 분명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가족의 존재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을 때 등장한 이 작품은 1919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떠올릴 때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내포한다.
<카드로 만든 집> (1919) / 그림출처. muzei-mira.com
<카드로 만든 집> (1919) / 그림출처. muzei-mira.com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오스카 니마이어)의 책임하에 꾸며진 브라질의 새 수도 브라질리아의 건축과 회화, 조각에 동시대 모더니즘 예술의 뛰어난 모든 것이 담긴 것과 같이, 알렉산드르 베누아가 1914년 책임을 맡은 모스크바 카잔 (기차)역 홀은 이들 ‘예술 세계’파의 활동을 관찰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장소다.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므스티슬라프 도부진스키,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 등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러시아’라는 주제였고 세레브랴코바는 (인도, 일본, 터키, 시암인들이 등장하는) '동방의 민족들' 시리즈를 스케치했다.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지주 가족들에 대한 약탈이 진행되면서 세레브랴코바 가족은 영지를 버리고 하리코프 등지로 이사를 거듭했다. 많은 작품이 파괴되었고 1919년 3월에 남편 보리스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세레브랴코바에게는 네 명의 자녀와 병든 어머니가 남겨졌다. <카드로 만든 집>은 이 시기에 그려졌다.

생계를 위해 그녀는 처음엔 고고학 박물관에서 전시품의 연필 스케치 작업으로 일자리를 찾았고, 다음엔 극장에서 연극을 모티브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마린스키 극장에 헌정된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 1924년에 그녀의 작품 14점이 선보인 뉴욕 전시회의 성공에 이어 그해 가을, 그녀는 대형 장식 패널 제작을 주문받고 파리로 갔다. 이후 그녀는 러시아로 돌아오지 못했고, 두 자녀는 데리고 있었지만 다른 두 자녀와는 생이별하는 비극을 겪었다. 흐루쇼프 해빙기 동안 소련 당국은 세레브랴코바 가족의 접촉을 허용했다. 세레브랴코바는 고향을 떠나 43년을 보내다 사망하기 2년 전인 1965년, 그녀의 전시가 모스크바에서, 이후 레닌그라드와 키예프에서 열렸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