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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에도 우연은 없다, 검정을 설계하는 작가 피정원
[이진섭의 음미(美)하다]
색(色) 표본실로 설계한 흑(黑)의 이데아...
보편적 감정을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작가 피정원
색과 질료의 실험으로 만들어낸 작가 고유의 블랙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작품이어야 관객도 설득할 수 있어
피정원 개인전 <Triptych>
성수동 갤러리 THE THIRD서 4월 11일까지
색(色) 표본실로 설계한 흑(黑)의 이데아...
보편적 감정을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작가 피정원
색과 질료의 실험으로 만들어낸 작가 고유의 블랙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작품이어야 관객도 설득할 수 있어
피정원 개인전 <Triptych>
성수동 갤러리 THE THIRD서 4월 11일까지
“어떤 것도 계획 없이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미를 창조하는 예술 덕분에 생겨나는 것이다.”
- 플루타르코스 <De Placitis Philosophorum>
추상화가 피정원은 자신을 ‘보편적인 감정을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라고 소개한다. 자신을 나타내는 검은색을 중심에 두고 다른 색들이 요동치게 만든다. 먹과 블랙 젯소를 섞고, 시멘트와 갈키드로 균열을 내고, 반복적인 실험으로 완전함을 구현한다.
질료의 섞음은 동-서양의 조합이요, 균열과 건조는 정교한 수학이다. 모호한 경계에서 그는 수없이 기록하고 연구하면서 아름다움을 찾아간다. 이러한 고군분투가 피정원의 블랙을 완전하게 만들고 빛나게 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과 베이컨의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삼면화의 미학적 의미를 탐구하고, 가장 완전한 원의 상태인 코로나 스플래시의 다양한 순간을 스케치한 흔적, 순열과 조합을 통한 색의 전개, 퇴보-현재-진보에 이르는 철학적 과정을 거쳐 피정원은 비로소 자신을 설득하고, 관객을 사로잡는다. 만약 그의 작품을 미래 시점에서 해석한다면 ‘프란시스 고야의 블랙 페인트, 21세기에 환생하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삼면화>의 블랙에 끌려 불현듯 피정원의 작업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보편적인 감정을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작가 피정원입니다."
▶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나요, 어떻게 이 세계에 빠져들었어요?
"중학교 때 캐나다로 넘어갔는데, 언어도 서툴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어려워 겉돌았어요. 그때 저를 처음으로 반겨준 분이 보니타 브레일린(Bonita Brailean)이라는 미술 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이 저에게 재료도 많이 가르쳐주시고, 미술에 대해 접근하는 법을 많이 알려주셨어요."
▶ 중학교 때부터 예술학교에 다닌 거예요?
"미술학교는 아니었는데 아이비 아트 프로그램이라고 미국 대학을 보내는 과정이 있는 학교였어요. 그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스럽게 미술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인자한 할머니셨는데 사실 그 분은 벤쿠버 파인아트 디파트먼트 헤드셨어요. 제일 높으신 분이셨는데 제가 난처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제 편이 되어주셨고, 미술 이상의 가르침을 주셨어요. 쉽지 않았던 캐나다 생활에서 좋은 어른을 만났죠. 제가 그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분을 절대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미술의 세계로 자연스러운 인도였죠. 그전까지는 건축가가 꿈이었는데 선생님을 만난 후 자연스럽게 파인아트가 좋아졌고요."
▶ 몇 년 전에 작업하셨던 검은 화면의 거대한 작품이 동굴의 경험에서 시작했다고 말씀하신 인터뷰를 본 적 있어요. 어떤 경험이었나요?
"2017년 멕시코의 세노테(석회암 지대에서 땅이 꺼져 지하수가 연못처럼 노출되는 지형) 동굴을 놀러 갔어요.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 상태의 동굴이었는데 운이 좋아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저희를 이끌었던 분이 “수천만년 어두웠던 이 동굴이 이제 작은 불빛 하나로 시작이 됐다. 이제는 꺼지지 않는 곳이 될 거다.”라고 말했는데 이 감정을 작품으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상상했어요.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고 교수님과도 얘기를 나누면서 저만의 ‘검은색’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캐나다에 있을 때 상도 많이 받고 그래서 제가 미술을 정말 잘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 상태로 프랫에 들어갔는데 당시에는 좋은 학교에 입학해 미술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신났던 것 같아요.
첫 페인팅 클래스 시간에 이 모든 게 무너졌어요. 전 세계에서 그림 좀 그리는 친구들이 모여있는데 제가 그중에서 가장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 되었어요. 순간,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고 느꼈어요. 좌절과 짜릿함이 공존했죠. 여전히 저에게 생생한 감정이에요."
▶ 프랫에서 배운 시기가 현재 작품을 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을 거 같은데요?
"운 좋게 2학년 때 즈음 비평가이자 기자로 활동하셨던 마리오 나베스(Mario Naves) 교수님을 만났어요. 교수님은 당시 제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려주셨어요. 제가 결핍에 대해 자극을 많이 받는 거 같아요. 윤형근, 남관 작가님 등 여러 위대한 작가님들도 먼저 알려주셨고, 저널과 참고자료에 대한 추천도 많이 해주셨어요. 학교에서 교수님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어요."
▶ 작가님 작품에는 여러 사람들의 영혼이 느껴져요.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요?
"너무 명확하게 마리오 나베스 교수님이고요. 그분도 사실 작가님이세요. 제가 처음 도형을 시도할 때도 교수님께서 많이 알려주셨어요. 그리고 키트 화이트(Kit White)라고 4학년 때 담당 교수님인데 그 분께서 제가 솔로전도 할 수 있게 해주시고 많이 이끌어 주셨어요. 두 분을 통해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자기가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작품이 달라지는 걸 배울 수 있었어요.
그리고 작가는 프란츠 클라인과 안젤름 키퍼를 제일 좋아해요. 직접적인 영감보다는 제가 도달하고 싶은 지점에 그분들의 생각과 작품이 있거든요."
▶ 수많은 기록과 연구를 해놓은 흔적이 작업실 곳곳에 있네요. 매우 계획적으로 잘 정돈된 그 무언가. MBTI가 혹시?
"ENTJ 입니다."
"어떤 사람을 설득시키는 것도 중요한 역할인데 제 자신이 설득이 돼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더라고요. 재밌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좋아하는 작업은 사람들도 좋아하고, 제가 좀 별로다 싶은 건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더라고요. 회화를 시작하고 추상을 어떻게 전달을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까를 배우면서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 그려보고, 그다음에 제가 추상적이라고 하는 부분들을 분리하면서 한편으로는 기하학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했어요. 저에게 스스로 드는 의문과 추상과 구상의 모호함을 줄이기 위해서 일기도 쓰고, 연구 노트와 습작을 꾸준히 하는 게 어느 지점의 감정과 경험을 구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 과정이 구상적인데 결과물이 추상적이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시는 거잖아요. 작가님은 자신이 무엇을 표현할지, 어떻게 표현할지 중에서 어떤 걸 먼저 떠올리세요? 특히 이번에 성수동 갤러리 더 써드에서 전시한 <Triptych: 삼면화>를 보면 이 작품의 시작점이 어디일까가 궁금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여러 장면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포착을 해 놓는 것이 감정을 도출시키는 게 더 효과적이겠다고 생각을 했다면, 이번 개인전에서 시도한 것은 그저 한 장면을 여러 개로 분쇄해서 보여주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라는 가설의 검증 목적이었어요. <Triptych: 삼면화>에서 보여드린 것은 특정 장소로 회귀한 건 아니었고 이 연구를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가 먼저였던 것 같아요. 만약 연구 목적이 아니라면 저는 특정 장소나 경험을 구현하기 위한 표현 방식을 택해요."
"맞아요. 여행을 가거나, 경험이 되게 자극적이라고 느끼는 순간 인위적으로 바뀌는 지점이 개인적으로 어렵더라고요. 예를 들면 저희가 어떤 동굴을 지나왔는데 어느 한 장면이 너무 예뻐서 이것만 기억해야지가 아니라, 부분과 부분이 이어져 하나의 추억이 되잖아요. 저도 항상 어려워서 어떤 장소를 다시 가는 경우는 있어도 맨 처음에 좋다고 해서 막 스케치를 시작하거나, 사진을 막 찍어내거나 그러진 않는 것 같아요."
▶ 작가님의 경험과 인상들이 연결되고, 버무려지고, 합쳐져서 (혹은 소거되어) 추상의 결과물로 나오는 거잖아요. 그 지점까지 도달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기록인가요?
"사실 기록도 맞는데, 아까 말씀드렸던 ‘감정은 보편적인데, 표현은 개인적이다.’라는 말과 상응하는 것 같아요. 제가 잘 구현한다면 보편적 감정까지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어요. 지금도 연구 중이고요."
"마리오 교수님과 알고 지내면서부터였어요. 교수님도 습관이 기록이시거든요. 교수님을 처음 뵈었던 게 대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 2014년도부터 쓰는 걸 습관화했고 아예 스케치북 형태로 정리했던 것은 2017년도부터였어요."
▶ 회화의 본질만 남게 하는 것이 추상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작가님은 그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 같거든요.
"저의 메시지는 명확하지만 작가가 던져야 되는 메시지는 그저 개인적인 것일 뿐 제 3자로서 저를 바라보는 그 영역은 제가 침범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의 정체성을 담고, 이야기하고 하는 그 도달점까지 꼭 도달해야겠다는 소신을 갖고 있긴 해요."
"정말 솔직하게 아직 ‘하나의 순간’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아요). 만약에 제가 정말 명확하게 어떤 한순간을 떠올릴 수 있고 그것으로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면, 물방울이 아닌 그 장면으로 이번에 이야기를 했을 텐데. 저도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보니, 저한테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과 이론 같은 거죠."
▶ 이 작품이 테스트 베드라고 볼 수 있겠네요.
"가장 중요한 작업이면서도 동시에 이전의 작품과 닮지 않은, 그러니까 저한테 하나의 공식이자 작업화된 노트라고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 삼면화 작업을 언제부터 시작하게 되었어요?
"삼면화는 사실 갤러리 더 써드에서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고민 중에 탄생했어요. 소마미술관에서 했던 전시가 너무 많은 아카이브를 보여줬다면, 이번에 새로 오픈한 갤러리의 시작점에서 제가 원래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작업한 거 같아요."
▶ 작업하시는 데는 얼마 정도 걸리셨어요?
"두 달 정도요."
"과하게 파는 건 언제나 균열이에요. 많은 실험과 노력 끝에 제가 쓰는 균열이나 미디엄들을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한 수준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번에는 텍스처를 원래 쓰던 레이어보다 좀 많이 높였거든요. 그래서 질료의 안정화에 좀 많이 집중했던 것 같아요."
▶ 노트를 보면서 피정원 작가가 추상 회화를 접근하는 방법이 저는 되게 재미있었거든요. 미학적, 수학적, 회화적 접근도 눈에 띄었고 형태적인 연구도 재밌었어요. 본인이 그냥 터득해 나가신 거죠?
"맨 처음 교수님으로부터 추상을 배울 때 존재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부터 배웠어요. 역사는 당연히 알아야 하고, 논문들도 제가 인용할 수 있는 건 참고하면 좋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도 생각을 잘 안 해봤는데 작가 생활을 평생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불안)과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희망)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요."
▶ 작가로 활동하다 보면 그 본인의 그런 치밀함 속에서 자아가 되게 내동댕이쳐질 때가 있잖아요. 그 힘든 과정들은 어떻게 극복해 가세요?
"우선, 제가 신뢰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면 그들이 동시에 방어막이 돼요. 그리고 오래 버틴다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잘 버텨낼 수 있다."
"저는 하루의 루틴보다는 일주일에 40시간은 무조건 미술을 채운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근데 40시간보다는 평균적으로 좀 더 많이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 올해 계획은 어떤 게 있으신가요?
"서울시립미술관이랑 미주 순회전을 해요. 공교롭게 캐나다와 미국에서 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그 단체전이 끝나면 여름에 라이프치히에서 레지던시에 머물며 유럽에서 개인전을 준비할 예정이에요."
▶ 10년 후 본인은 어떤 모습이 돼 있을 것 같아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미술로 사람들을 잘 설득할 수 있는 작가가 돼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좀 있어요."